상편에서는 잠시 노벨문학상의 역사적 현황을 살펴봤습니다. 과거에는 노벨문학상이 어떻게 인식됐는지 몰라도 현시점에서 보면 ‘진짜 세계적인 상’이라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로만 국한해 본다면 노벨문학상의 성격은 조금 다릅니다.
먼저, 수상자 출신 지역 분포입니다. 총 22명의 수상 작가 중 서양 작가로 구분할 수 있는 작가가 17명으로 여전히 많습니다. 전체의 77%를 차지하고 있지만 2000년대 이전에는 약 85%의 수상자가 서양 작가였던 것과 비교하면 서양 중심의 상으로부터 조금씩 탈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머지 5명의 작가는 다른 세계 출신의 작가인데, 아프리카에서 2명의 작가가 수상했고 아시아에서도 2명의 중국 작가가 수상했습니다. 중국의 약진은 중국의 세계 영향력 확대와도 연관이 있을 듯합니다. 다른 하나는 2006년도에 수상한 튀르키예(구 터키)의 오르한 파묵(Orhan Pamuk)입니다.
다음으로 여성 작가의 수상 비율을 살펴보겠습니다. 여성 작가 수상자는 총 22명 중 6명으로 약 31.8%를 차지합니다. 수상자 10명 중 3명은 여성 작가라는 의미죠. 2000년 이전의 여성 작가 수상은 총 96명의 수상자 중 고작 9명이어서 약 0.09%만이 여성 작가였습니다. 수상자 11명 중 1명만이 여성 작가였다는 것이죠.
참고로 2010년대 이후로만 따지면 여성 수상자 수는 11명 중 4명으로 여성 작가 수상 비율이 조금 더 올라갑니다. 이런 추세를 고려해 감히 예측해 보건대, 2022년도에는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거로 예측해 봅니다. 2021년 수상 작가는 남성이었으니까요.
◆‘찐’ 세계적인 상으로 발돋움하는 노벨문학상
-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확대되고 발전하는 세계
‘찐’ 세계는 모든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이 똑같이 주어지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종, 지역, 성별 등의 차이가 차별로 드러나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현시점에서 과거를 비판적 시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기존 노벨문학상을 세계적인 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서양 남성 작가들에게 주어진 상이었다”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물론, 과거에는 남성 작가들이 여성 작가보다 훨씬 더 많았고, 중심 언어도 대부분 서양의 언어였으니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아주 드물지만 여성 작가도 수상했고, 서양 이외의 세계에서도 수상자가 등장했다는 점을 볼 때, 거의 일방적으로 서양 남성 작가들에게 상을 줬다는 것은 분명 편견(서양 우월 사상, 남성 우월 사상)이 반영됐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동안 세계의 역사가 서양을 중심으로, 남성의 지배를 보편화했으니 노벨문학상도 그들만의 상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현재도 서양 세계에서 수상하는 작가가 압도적으로 많고, 여성과 비교할 때 남성 수상자가 더 많습니다. 단, 그 갭을 점점 좁혀가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고, 이러한 차이가 계속 좁혀지다 보면, 노벨문학상이 ‘찐’ 세계적인 문학상이 될 날을 기대해도 좋을 듯합니다.
요컨대, 더 다양한 출신의 작가가 수상하고, 더 많은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 ‘찐’ 세계적인 노벨문학상의 권위가 세워질 것입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세계에 확대되고 발전할수록 노벨문학상의 세계화가 가능해질 것이고요.
◆단순 호기심에서 생각해 보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가능할까?’
노벨문학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매년 후보로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 올릴 듯합니다. 하루키의 팬들은 수상자 발표 날이면 작가의 수상을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루키 작품을 전부 읽지는 않았지만 『상실의 시대』, 『1Q84』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분명 하루키는 매력있는 작가입니다. 상상력, 표현력, 구성 등에 있어서 작가의 탁월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를 물어본다면, 올해도 수상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은 보통 시간(역사), 공간(지역), 인간(시간과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을 다룹니다. 물론, 하루키도 시간, 공간, 인간을 다룹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각각의 차이점을 정리하자면, 먼저 시간 부분입니다. 하루키는 역사를 잘 다루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2021년에 수상한 구르나는 아프리카 식민시대(암울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역시 『만연원년의 풋볼』에서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룹니다. 반면 하루키는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다음은 공간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하루키 특유의 문체는 일본의 감성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특성에 가깝습니다. 일본 출신이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특유의 문체일 뿐입니다. ‘하루키의 일본스러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특색은 강하지만(그래서 매니아 층이 형성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은 조금 떨어집니다.
또한 하루키의 문체는 개인적이면서 감성적입니다. 반면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공간 인식은 사회적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사회 비판적입니다. 그러니 문체가 건조하고, 자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사회 비판)과 관련해 하루키 소설은 노벨문학상과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우회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열린 의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의문인지도 모른 채 그냥 덮을 수도 있다는 의미죠.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분명히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대신 결말은 열어두지만요...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부분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인간은 당연히 비판적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니 비판적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 자조적이기도 하고(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뫼르소), 때로는 성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루키의 인물들은 개혁, 성찰, 성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계몽적인 요소가 없기에 더 친숙하고, 그래서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 역시 ‘하루키의 일본스러움’이 짙게 배어있어서 보편적 세계인으로 확대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작품의 수준 등으로 볼 때, 굳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작가입니다. 단,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단서들과는 달리 수상 가능성을 열어 둔 이유는, 다양한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선정되는 추세를 고려할 때 “노벨문학상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한 스펙트럼을 넓히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미 일흔을 넘어섰지만, 하루키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걸로도 유명합니다. 따라서 좀 더 긴 날을 생각하면서 그의 수상을 기다려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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