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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15)] 헨릭 시엔키에비츠(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쿠오 바디스』

- 사라진 첫 마음,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한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6.13 15:39 의견 0

작가는 폴란드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1905년에 문학상을 수상했으니, 초기에 수상한 셈이다. 유럽의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있고 그 안에 수많은 작가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 생각에 유럽의 변방이라 느껴지는 폴란드 작가의 수상은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폴란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 것이다. 국가가 분열됐다가 소멸되기도 하고, 다시 생성돼 유지 되다가 근·현대에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주변 강대국 가운데에서 항상 약소국으로 살아야 하는 게 폴란드의 숙명이었다. 마치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와 닮은꼴이다.

작가는 폴란드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자긍심을 키우기 위한 작품들을 썼고, 『쿠오 바디스』도 그런 맥락 속에서 출간했다. 세상의 어떤 위협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통해 폴란드 국민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준 것이다. 작품은 1895년에 출간돼, 알다시피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도 각색 돼 만은 관중에게 감동을 줬다. 출간 된지 130년이 다 되어가지만, 독자에게 뭉클함을 주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 시대이다. 네로 황제 시대에는 유명한 기독교 사도들이 많이 순교했는데, 작품에도 베드로와 바울이 등장하고 순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야기는 회의주의자이자 철저히 인본주의자인 페트로니우스와 그의 조카 비니키우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망국의 공주 리기아를 사랑하게 된 비니키우스는 처음에는 로마식으로 그녀를 정부로 삼으려 하지만, 여러 과정–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하고, 리기아의 옥살이를 지켜보기도 하고, 자신의 무기력함을 경험하기도 하는–등을 거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된다. 반면 철저한 회의주의자 페트로니우스는 결코 개종하지 않았다. 로마의 광폭한 무력 앞에도 사랑을 선포하며 죽음 앞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띠며 순교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온화한 모습이 본 소설의 핵심이다.

무력에 대항한 무력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용서가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게 작품의 여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중에 백미(白眉)는 로마를 떠나려 했던 베드로가 환상 중 예수를 만나 “쿠오 바디스, 도미네?”라고 묻고 그 대답으로 예수가 “네가 내 어린 양들을 버렸으니,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픽션 일망정, 어쨌든 세계가 바뀌는 전환점인 사건을 가정한 것이다.


◆권력을 잡으면 종교도 정치를 한다

로마 시대는 인간이 신격화 됐던 시대다. 황제는 죽어서 신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는 동안에도 신으로 섬겨졌다. 그러나 로마의 신은 실수도하고 욕심이 있으며, 잔인하며, 때로는 비이성적이기도 하다. 단지(Just) 인간인 셈이다.

다만, 정치적 지도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인간과 다른 ‘신’에 통치력을 부여하여 인간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한 정치적 술수였다고 볼 수 있다. 신에게 대항한 인간의 최후는 별로 좋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한국에는 신이 까불면 자신에게 죽는다고 발언한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지만.

위의 내용을 좀 더 해석하면 신격화는 황제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새로운 종교는 정치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신이 다스리는 로마인데, 다시 말해서 오류가 없는 신의 치리가 이뤄지는 로마에, 진짜 신을 소개하는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그게 바로 기독교다.

작품 속에서는 유대교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지 않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야훼’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나, 예수를 놓고서는 생각이 다르다. 오히려 예수를 기준으로 두 종교는 첨예하게 다른 종교가 된다. 유대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몫 달았고, 기독교인들은 그런 예수를 메시야로 섬기니 말이다.

황제의 신격화를 인정하지 않은 기독교인에게 신은 오로지 한 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상은 황제가 다스릴망정 영원히 살아야 할 저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믿는다. 정치와 종교가 거의 일치한 상황, 그 힘이 모두 황제에게 몰려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신이 등장하면서, 황제를 인간화 한다. 그러니 종교를 통한 통치가 기독교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신의 권위를 꾸준히 누리고 싶었던 황제에게는 큰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걱정한 것은 물리적 저항이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기독교는 물리적 저항을 포기한다. 그저 죽이면 죽음을 당하고, 고통을 주면 고통을 겪는다. 그러고 나서, 사랑과 용서를 전한다. 작품 중 페트로니우스는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영생에 대한 부정과 인간의 환락을 추구했던 페트로니우스도 기독교의 진심과 전파성에 대해서는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역사 속 기독교는 조금 더 시련을 겪다가 AD 313년부터 권력을 차지한다. 이후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기독교가 권력을 잡으면서 정치화 된다. 정치화를 거부하고 그 위에 거처했던 기독교가 지상화 되면서 새로운 폭군이 된 것이다.

◆신앙서로 읽어도 되고, 새로운 운동성으로 읽어도 된다

기독교 신자라면, 베드로의 “쿠오 바디스, 도미네?”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을 듣고 뭉클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해석하면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이라는 뜻이다. 생명 보존이 어려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로마로 간다”고 대답한다. 그 답을 듣고 환희에 젖고 확신을 얻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전략이 있다. 후일을 도모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략은 순교였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다. 베드로 등과 같은 제자들은 그들은 스승인 예수를 직접 봤다. 그 제자들을 봤던 또 그들의 제자는 어쨌든 제자들로부터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생함이 책이 되고, 편집되고, 조금씩 왜곡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사랑’, ‘용서’, ‘용기’라는 기독교의 가치이자 만고진리는 그대로 유지됐다. 그래야만 했다. 또 다른 시각에서 작품은 운동의 방향을 말해준다. 현재 운동은 어떤 종류든 신념보다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좌우지 된다. 현실적으로 운영비 없이 유지할 수 있는 시민단체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면, 운동의 방향성이 사라진다. 그냥 정착, 고여 있을 뿐이다.

작가와 같은 국가 출신이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가르추구’의 『방랑자』에서는 머물러 있음에 대해 경고한다. 고인 물은 부패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본 작품은 어려움이 있어도 방향을 유지하라고 직언한다. 기독교의 방향은 사랑과 용서의 전파였다. 초대 기독교는 어떤 시련이 있어도 이런 방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세가 아닌 내세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없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정착해 버리면, 몸을 사리게 된다. 베드로가 몸을 사리고 로마를 떠났다면, 이후 기독교는 어떻게 변했을까? 작품은 처음 운동을 시작했던 첫 마음과 그 방향을 유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개독교와 VS 기독교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러니, 중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의 발전과 오류의 공과에 기독교의 지분은 상당하다. 특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그 역할이 더 컸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언젠가는 개독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복수(復讐), 기독교의 선민사상, 기독교의 무지함(기독교 근본주의는 실제로 사실로 밝혀진 과학적 진실도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등은 이후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면죄부를 제공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전쟁, 테러, 살인, 폭력 등 하나님은 철저히 사랑과 용서를 말했는데, 권력을 쥔 종교인들의 행태는 신과 무관하다. 그들이 권력과 돈과 성을 사랑했을지 몰라도 아가페적인 사랑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개독교는 느닷없이 등장한 용어가 아니라, 현상은 이미 있었고 적당한 용어만 고르고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전광훈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기독교를 욕보이고 있다고 한다. 호칭이 목사이긴 한데, 목사라는 역할에 맞게 살지 않으니, 목사는 아니다. 그저 교회 간판을 단 건물이라고 해서 교회라고 칭할 수 있다면, 내 집 문패에 대통령 집무실이라고 붙이면 대통령 집무실이 되는 것인가? 그러니 전광훈은 교회의 목사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잡지 못할까? 속담처럼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는다’라고 이해하면서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일까?

내버려 두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전광훈을 기독교의 목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수많은 목사들조차 목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는 목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자의 역할은 뭘까? 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맹수와 싸워서 양을 지켜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재 목사는 목자의 옷을 입은 맹수다.

JMS와 같은 일들이 비단 사이비 종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교회에서 그 수위(성폭력, 성희롱 등)는 약할지라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쥐고, 돈을 착복하고, 성을 밝힌다. 그러니, 전광훈이 등장해서 설치고 다녀도 무게 있는 결언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광훈의 똥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본인이 싸지른 똥도 치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기에 지켜 볼 뿐이다. 오히려 다른 목사들의 비리가 터질 때마다 두려워하는 목사들이 더 많을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기독교의 방향과 가치를 보고, 자신은 받아들이지 못해도 언젠가는 그리스도교가 세상을 지배할 거로 생각했다. 기독교 공인 이후 누군가는 분명 기독교의 개독교화를 예언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듯하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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