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1977년에 출간됐다.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기를 겪었던 세계. 그러다가 쿠바 사태 이후 미소의 전면전은 발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서,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그라스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썼는데, 『넙치』 역시 역사를 다룬다. 다만,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는 한 세대 수준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를 아우르며 거침없이 헤집는다. 작품을 읽는 동안 작가의 해박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런 해박함을 소설로 옮겨 놓은 작가의 능력에 경외감마저 느꼈다.
한 남자에게 넙치가 잡힌다. 넙치는 자신을 놓아주면, 모계 중심으로 이뤄진 사회 속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남자를 해방시키고 그 지위를 역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말하는 넙치가 신기했던지 남자는 넙치를 놓아주었고, 이후 넙치는 남성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부권사회로 역사를 바꿔간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석하게도 남성들은 세계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여성권이 다시 부상하면서 넙치는 여성들에 의해 피고가 돼 재판을 받게 된다. 넙치의 조언으로 일그러진, 남성 중심의 세계에 대한 재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서 넙치는 총 9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들의 지위가 변화해 가는 역사적 모습을 구술한다.
넙치는 형(刑)을 면하기 위해서 남성들에게 조언을 하지 않고, 이제는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해서 극형을 면하는 듯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형벌은 넙치 시식회였다. 남성들에 의해 기록되고 진행되어 온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혹시 여성들이 남성을 대신했다면 더 좋았을까?”라는 질문에 작가의 회의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 알고 보면, ‘도긴 개긴’이라는 의미다.
◆대립의 역사: 진보라는 착각
작품은 불평등과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물리적인 전쟁, 관습적 폭력 행태, 사회 속에 내재한 계급 불평등, 남녀 불평등 등 다양한 종류의 불평등과 폭력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불평등은 폭력을 정당화하고,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작가는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훑으면서 그게 인류가 살아 온 자취라고 일소(一笑)한다. 작품을 읽으면 그 누구도 ‘진보’나 ‘발전’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가는 현실을 희화화 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우연만이 역사의 원인인 듯, 계획적인 역사를 부정한다.
작가의 역사관에서, 대립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귀족과 노예, 더 크게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이런 대립은 꾸준히 이어져 현재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정반합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도대체 진보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작가는 대립이 세상의 원리였음은 맞지만, 그 대립이 꼭 발전과 진보를 가져온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보자. 세상이 살기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 기준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환경, 다른 생물체들에게 과연 세상이 살기 좋아졌을까? 어쩌면 온 우주는 제로섬 게임을 장구(長久)히 진행 중인 것은 아닐까?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
작가는 최초에 여성이 세상을 지배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여성이 누렸던 자리를 남성이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추론한다. 이후 역사는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넙치는 그런 가운데서도 의미심장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을 등장시킨다.
최근 페미니스트들은 영어로 역사를 뜻하는 단어 ‘history’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곡해하며 ‘herstory’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역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 뜻은 ‘탐구해서 안다’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누가 ‘히스토리’라는 단어를 남성의 이야기라고 전한건지는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역사가 남성들만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근거 역시 일천하다. 이런 부적절한 언어의 대립만 보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정과 반의 대립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넙치는 남성들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동안 세상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본 세상은 그럴 법도 하다. 전쟁 이후 냉전으로 인해서 또 전쟁이 있었고, 물리적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갈등의 요인은 계속 존재했다. 어쩌면 세상은 인간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대립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자연은 인간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과거였는데, 이제는 더 버티지 못한 자연이 인간을 몰아내고 있다. 지구 온난화, 이상기온, 이상기상현상 등 이제 세계는 인간 VS 다른 모든 것이 된 듯하다. 결론은 주체가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 ‘대립’이 서로 반목하게 하면서 세상을 유지하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대립의 역사이다
최근 여러 채널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대립뿐이다. 원래 대립은 적대 세력을 두고 있을 때 발생하는데, 최근에는 같은 편끼리도 대립하는 모습이다. 같은 편 내에서도 차지해야 할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현재 벌어지는 그들만의 다툼을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양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사익을 쟁취하기 위한 각개전투(각개전투만큼 힘든 훈련이 없다)로 보인다.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단어를 ‘똘레랑스’라고 한다. 종교전쟁 이후 신교와 구교가 무모한 살육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의 종교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등장한 언어라고 한다. 굳이 번역하면 ‘관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몰상식한 퇴장,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잘 못 됐다고 여기는 억지 등을 볼 때, 다양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퇴행으로 가는 대립으로 보인다. 국제 수지가 악화됐고, 물가는 천정지부 뛰어오르고, 정치는 파행적이며, 사회는 기상천해 한 사건으로 가득한 현 시점에 넙치가 대한민국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대한민국에는 어떤 말로도 조언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발전과 진보와는 상관없다고 이야기 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조금 나아질까? 더 나빠질 수도 없으니, 점점 나아질까? 이문열 작가의 작품을 패러디해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나 역시 추락에는 날개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 아래는 없다고 생각할 때, 그 아래가 존재함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계속)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