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그라스가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한 독자는 “또 노벨문학상을 받아?”라고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였다. 단치히 3부작 중 첫 작품인 『양철북』으로 일약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는데, 읽다보면 솔직히 ‘이런 작품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읽히지 않아 선뜻 대중적 인기와 연결시키기 어려웠다. 아니면 독일 국민의 수준이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10여 년 전에 한번 1독을 도전했다가 읽는 둥 마는 둥 했던 기억이 있을 정도니, 문학과 친하지 않은 독자라면 읽어 보려하다가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정상인이 아닌, 성장이 멈춘 주인공이 등장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작품 속 상황들은 좀처럼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남지 않으니, 읽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고, 그런 작품일수록 흥미를 잃고 중간에 책을 덮기 마련이다. 아울러 제목, 숱하게 등장하는 ‘양철북’에 대한 의미도 이해하기 어렵고, 굳이 세 살 나이에서 성장을 멈춘 채 살아가는 주인공 ‘오스카’의 상황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세계 대전을 포함한 유럽의 암울한 조각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성장이 멈춘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일까? 나를 비롯한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여전히 쉽게 읽을 수 없다.
작품은 주인공 ‘오스카’의 할아버지 시대부터 시작한다. 공장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다가 할머니의 도움으로 구조돼 부부의 연을 맺고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가지만, 결국 신분이 밝혀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 ‘콜야이체크’에 이어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어머니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머니는 가까운 사촌 ‘얀 브론스키’와 애정행각을 펼치는 데, 어찌된 일인지 할머니는 그 일을 방관한다. 그러나 근친혼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어머니는 ‘오스카’의 법적 아버지가 되는 ‘알프레드 마체라트’와 결혼한다.
오스카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법적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오스카의 성장이 기형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오스카의 추론은 독자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스카는 나이를 먹지만 신체적 나이는 먹지 않았고, 정신적인 나이만 먹을 뿐이었다.
그래서 일까? 정상인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시야를 가졌기에 그 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설명한다. 세 살 때부터 선물로 받은 양철북에 집착했고, 상황과 관계없이 어디서나 북을 두드려댔다. 누군가 오스카의 북 치는 행동을 방해하면 그는 크게 소리를 질러 주변에 있는 유리로 사물을 산산 조각 냈다.
전쟁 시기, 그리고 전후 처리 기간과 다시 전쟁 기간을 겪으면서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인물들이 사망하고 특히, 마체라트가 사망할 때는 그의 양철북을 무덤에 던져 버린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신체적으로도 성장하면서 꼽추가 된다. 전후에는 생계를 위해서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고, 드럼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유명세와 부를 동시에 얻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고 법정에 서게 되는 데, 그의 신체적인 결함 등이 고려돼 정신 병원에 수감된다.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 오스카는 새로운 예수가 되리라 선언하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정상적이지 않은 주인공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치히 3부작’은 우리나라에 다 번역돼 있지 않다. 첫 작품 『양철북』, 두 번째 작품 『고양이와 쥐』만 번역돼 있다. 두 작품 모두 특이한 주인공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아마도 작가의 인생의 경로를 훑어볼 때, 모든 주인공은 작가 스스로 생각한 자신의 특이점, 혹은 미숙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본 작품에 등장하는 ‘오스카’는 세 살 때 우연한 사고(?)로 성장이 멈췄지만, 양철북을 잘 두드리고, 목소리로 유리를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정신적인 수준은 일반 성인 수준이상인 인물이다.
왜 작가는 이런 기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켰을까? 오스카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그리고 전후 처리기를 거치고 전쟁 전 상황의 암울함을 누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작품 속에 정상적이지 않은 오스카의 등장은 결국, 정신과 신체가 밸런스를 이루지 못한 오스카처럼 유럽의 정신과 성장의 위태로운 불균형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아울러 작가 본인이 후에 고백했듯이 독일군으로 활동했던 자신의 오류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명령에 복종하는 정상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지적했다면, 작가는 20세기 초기에 이뤄진 상황을 정상적인 인류가 저질렀다고는 믿을 수 없었기에 기형적인 인물을 등장 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기형적인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이라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수는 있으니 말이다.
◆편견, 그 무서움에 대하여
오스카는 세 살짜리 몸을 가지고 있다. 후에 법적 아버지 마체라트가 죽고 나서 조금 성장하긴 했으나, 그때는 등에서 혹이 같이 자라면서 꼽추가 돼 버린다. 성장이 멈췄던, 아니면 조금 성장했던 간에 오스카는 기형, 혹은 장애인 이었다. 외형적인 모습이 이렇다 보니,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기 일쑤고, 그를 꾸준히 알았던 사람들도 조금씩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곡된 신체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오스카는 그 재능으로 도둑질도 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적 인간이었음에도 범죄자로 인정되지 않고, 정신적인 문제로 판단해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조치만 내려질 뿐이다.
당시 역사로 돌아가 보자. 히틀러를 처음 만났던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은 단신(單身)이었던 히틀러의 야욕을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양철북을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할 만큼 시끄럽게 두드릴 줄 알았을까? 아울러 초기 승전보에 환호성을 지르던 독일 국민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이 비정상적인 만행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이 처한 환경, 그리고 나치의 선전에 세뇌된 대중은 승리에 도취돼 그들의 오류를 인지하지 못했다.
오스카는 신체가 성장하지 않았을 뿐, 정신은 일반 성인 이상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성인 이상의 정신세계가 반드시 선(善)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스카의 외모에 대한 편견으로 그는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
◆외모로 판단하는 세상
역사라는 큰 시간 속에서 나와서, 이제 일상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오스카는 한 남성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연인을 만나서 사랑하고 싶었고, 가정도 만들 길 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평범한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와 정사를 나눴던 ‘마리아’는 그의 법적 아버지의 새로운 아내가 됐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오스카는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물론, 진실은 마리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마리아’였을까? 성경 속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도 있지만, 창녀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도 있다. 오스카의 사랑하는 마리아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나는 후자로 생각한다. 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사람에게 몸을 대주는 창녀.
이후 아버지가 죽자 오스카는 법적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청혼을 한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마리아,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마리아는 오스카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스카의 경제적 도움은 거절하지 않는다. 마리아가 오스카와 정사를 나눴을망정 남편으로 맞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결국, 그의 외모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계를 위해 오스카는 화가 지망생들 혹은 화가들의 누드모델이 되기도 하는데, 그의 역할은 항상 어두운 쪽과 관련이 있다. ‘죄와 벌’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죄’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상적이지 않은 오스카는 오직 그의 외모만으로 부정적인 역할에 어울리는 모델로만 규정된다. 실제로 여러 심리학 실험 결과를 보면, 실제로 준수한 외모의 사람들이 취업도 더 잘하고,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못생긴 오스카의 손아귀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놀아났다는 것이다. 그는 불량배를 선동하기도 했고,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라 드럼 연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했다. 대중들에게는 부정적인 눈길을 끌었던 오스카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도대체 누가 정상이고, 누가 악당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작가는 일반적인 인간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양철북』, 『고양이와 쥐』, 『넙치』 등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기형적이며, 『넙치』에서는 아예 ‘넙치’를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왜 정상적인 인간을 등장 시키지 않았을까? 작가는 세상을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진보’라는 언어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고 했다. 세상은 진보한다는 게 진실이라고 여기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작가는 처음부터 그로테스크한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이야기 자체도 흐린 날씨처럼 우중충 하다.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일반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고, 그래서 작가의 관점에 동의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예술은 타협을 모르지만, 정치는 타협을 먹고 산다.”라고 스스로 말 한 것처럼 자신의 문학 이야기에 ‘타협’이라는 요소를 빼버렸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기에 그가 스타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다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외친 특이함이 대중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 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는 끊임없이 정치 이야기를 한다. 문학 속에서 다뤄지는 정치 이야기는 온전히 작가의 생각이면서 주장이다. 그가 말한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협은 일방성이 아니라 쌍방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브앤테이크’를 의미한다. 다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항상 균형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거의 대부분 협상 대상의 손익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우리나라 대통령은 가까 우면서도 먼 일본 수상과 오랜만에 정상회담을 했다. 타협의 장이 열린 것이다. 아직 결과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과정은 아니었다. 비판자들이 말하는 굴욕, 매국 수준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 잃은 것이 많아 보인다. 먼저, 물 컵의 반을 채웠다고 하는 그럴듯한 말도 따지고 보면, 얻은 게 반이 아니라 준 것만 반이라는 의미다. 이제 아무리 얻어도 손익 분기점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가 줬으니, 도의적으로 일본이 우리한테 비슷한 수준의 대가를 지불할 거라는 낭만적인 판단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현 야당과 일본에 준 것처럼 타협하고 포용했다면, 역사에 길이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정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협치나 정반합의 과정은 누가 봐도 분명히 아니다. 진보를 위한 ‘정반합’이 아니라, 퇴보를 ‘정반차’의 과정이다.
권력을 가진 무리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최대한 권력을 행사하려하고, 권력을 잃은 무리는 그 억울함을 달래려고 한결같은 부정으로 막아선다.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은 늘 여당의 오스카가 양철북을 치면, 야당의 오스카가 더 큰 양철북을 가져와서 더 시끄럽게 두드리는 형국이다. 그러다 서로 북을 빼앗으려 하면 소리를 질러서 주변을 황폐화 시킨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했던 기형적인 시선은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 성격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독선의 소리가 사회를 시끄럽게 할 때, 당연히 주변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최근 여당의 한 최고위원이 극우파 목사를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작품에서 기형적인 오스카를 리더로 세우는 모리배(謀利輩)의 모습, 그리고 오스카 스스로도 제2의 예수로 선언하는 모습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픽션 『양철북』이 아닌 논픽션 『양철북』을 직접 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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