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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알자] 첨단기술과 데이터 유출 - 침탈의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정회주 전문위원 승인 2024.09.18 15:57 | 최종 수정 2024.09.18 16:01 의견 0

1. 중국으로의 첨단기술과 데이터 유출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전 임원과 연구원이 구속됐다. 경찰은 유출된 기술의 경제적 가치가 4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전방부대의 CCTV가 영상이 유출될 수 있도록 설계된 중국산이었다는 보도도 있다. 우리 전방의 데이터가 중국으로 흘러간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중국산을 국산으로 둔갑시킨 것이 더 큰 문제다. 기사 제목만 봐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①“전방부대 수상한 CCTV 알고 보니…영상 유출 설계된 중국산”(중앙일보 9.13), ②“전방에 ‘보안 우려’ 중국산 CCTV…군은 10년간 모르고 있었다” ③“국산입니다. 국방부 속았다…전방 부대 CCTV 1,300여 대 철거”(SBS, 9.13) 등의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국방부의 발표다. “문제의 CCTV에 찍힌 영상이 중국의 특정 서버로 연결돼 유출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파악됐다”면서도 “실제 유출된 정보는 없다”고 했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외계인을 보지 못했다고 외계인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

2. 뼈아픈 첨단 기술 유출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연산 9년(1503년)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의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연산군 앞에서 보고했다. 이에 연산군도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이것이 연은분리법이고 회취법(灰吹法)의 일종이다.

비단 제조와 착용을 권장할 정도로 사치를 장려한 연산군이었으므로 민간이 참여해서 은 채굴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은 생산은 증가했다. 심지어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은 3,000냥을 가지고 갈 정도로 조선에서의 은 사용은 확대되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중종반정 이후 조선의 은 생산기술과 채굴은 적폐 취급을 받았고, 조선의 은광 산업도 몰락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몰락하던 은 생산기술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다른 길을 걸었는데,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지정하면서 매년 독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시마네현에서 조차 블로그에 “1533년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회취법이라는 불리우는 신기술을 이용한 은정련이 이루어져 (일본의) 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시마네현 청, 이와미은산 역사)

또한 10년 후인 1543년에는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철포(鐵砲)가 전래되면서 이것이 일본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역사가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화력조선Ⅱ, 국립진주박물관) 철포는 크기가 작아 위력은 약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점화되는 순발식(瞬發式)이므로 흔들림이 적어 정확하게 표적을 맞출 수 있었다. 철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무기이었다. 일본의 철포는 제작 혹은 구매하는데 드는 비용이 크므로 은광 개발과 대외무역을 통해 재원 마련이 가능한 다이묘들만이 세력을 확장했고,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자(霸者)가 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은을 화폐제도의 근간으로 삼았고, 전세계 절반 이상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 17세기에 일본은 전 세계 은 생산의 1/3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에서 은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다. 1637년 베이징으로 갔던 김육에게 명나라 육국상이 관리들의 탐욕스러운 풍조를 비판하며 남긴 말이 “은자(銀子)가 있어야 의(義)가 있고 기(氣)가 있다.”(조경일록朝京日錄)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때 조선은 “포필(布匹)을 사용하여 쌀·콩·말먹이(풀단)와 서로 바꾸는 수준”(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에 불과했다. 조선이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나를 여실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3. 반복되는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다소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연은분리기술이 다이묘들의 경제회복과 텟뽀라는 신무기의 확산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이것이 임진왜란으로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에 문자를 전하고, 불교를 전하고, 고려대장경을 전하고, 도자기를 전하고, 활자를 전하고 에도시대의 정신문화의 기초를 만들고, 심지어 통신사를 통해서 일본에 널리 문화를 전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흐름으로 말하면 회취법을 전한 것이야말로 더욱 자랑해도 좋을 것 같다. 일본의 근세가 은 생산의 개발의 결과로 초래된 교역의 확대, 유통경제의 확충에 극히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新井 宏, 金属を通して歴史を観る)라고 까지 표현하는 일본의 학자도 있다.

연은분리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처럼 지금도 미래의 먹거리 기술을 팔아먹고 우리의 적을 감시하는 CCTV 영상까지 유출토록 설계한 부품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시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일 때문에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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