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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5년 을사년 - 과학혁명과 흑사병의 시대

※연재: 여덟 번의 을사년이 말하는 것 4회

방랑식객 진지한 승인 2025.01.12 23:59 | 최종 수정 2025.01.13 00:19 의견 0

17세기는 흔히 '과학혁명의 시대'로 불립니다. 이 시기에 인류의 자연에 대한 이해는 획기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시작으로,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 등이 차례로 발표되면서 중세의 우주관은 근본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1665년은 이러한 과학혁명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 해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던 젊은 시절의 아이작 뉴턴이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고향 울스소프로 돌아가게 된 해입니다. 이 '강제된 휴식'의 시기 덕에 뉴턴은 후일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알려질 혁명적 아이디어의 단초를 발견하게 됩니다.

■ 대흑사병의 재래

1665년 런던을 강타한 흑사병은 14세기의 대흑사병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염병이었습니다. 약 10만 명의 런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당시 런던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였습니다. 흑사병을 피해 도시를 떠난 사람들로 인해 런던은 잠시 동안 유령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의학은 아직 미생물의 존재나 전염병의 정확한 전파 경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특이한 모양의 '페스트 의사' 복장을 착용했는데, 새의 부리 모양 마스크에는 향신료를 채워 넣어 '나쁜 공기'를 막으려 했습니다. 이는 질병이 공기 중의 독기(瘴氣)에 의해 전파된다고 믿었던 당시의 의학 이론을 반영합니다.

■ 뉴턴의 '기적의 해'

뉴턴에게 있어 흑사병을 피해 한적한 시골인 고향에서 보낸 18개월은 놀라운 창조의 시기였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빛과 색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만유인력에 대한 기본 개념을 구상(1666년)했습니다. 후일 뉴턴 스스로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나는 그 때 생각하는 데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창조적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특히 뉴턴의 사과라 불리는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사과가 실제로 뉴턴의 머리에 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지상의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 운동을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뉴턴의 혁명적 통찰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과학혁명이 가져온 변화

뉴턴의 업적들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를 넘어 인간의 세계관 자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우주의 운행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한 흑사병의 경험은 전통적인 의학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며, 새로운 과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일깨웠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어지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토대가 되어 '이성의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자연현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후일 사회와 정치 영역에도 적용되어 근대 사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선 어떤 일이?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조선은 효종이 서거하고 현종이 즉위한 초기로, 1659년에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예송논쟁이 벌어졌던 때였습니다.

예송논쟁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역설적으로 조선 시대의 철학 발전과 학문적 성과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예송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촉발하는 사건이었고, 이는 조선 성리학이 독자적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1725년의 을사년으로 넘어가, 조선 영조의 즉위와 청나라 옹정제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적 실험들은, 전통 사회가 어떻게 변화와 안정을 동시에 추구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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