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학(考現學)이란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참된 모습을 규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고현학]은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사안 하나를 주제로,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펼쳐보는 이색코너입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를 중심으로 정리한 넓고 얇은 내용이지만, 일상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의 층위를 높여가 보자구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세시풍속 중 하나인 섣달 그믐의 고현학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풍습과 문화가 담겨있는 뜻깊은 날입니다.
1. 섣달 그믐의 의미와 어원
현대 사회에서는 날짜를 ‘1일, 2일, 3일’과 같이 숫자로 표기하고 읽는 것이 익숙해져, ‘초하루, 초이레, 그믐’ 등과 같은 전통적인 날짜 표현이 점차 낯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 조상들의 시간 인식과 문화가 담긴 소중한 언어 유산입니다.
‘섣달’이라는 말은 ‘설윗달’ 또는 ‘서웃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설날을 맞이하게 되는 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믐’은 ‘사그라진다’는 뜻의 순우리말 ‘그믈다’의 명사형으로 보름달이 날마다 줄어들어 눈썹처럼 가늘어지는 마지막날을 ‘그믐’이라 한 거죠. 따라서 섣달 그믐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의미합니다.
2. 까치설은 뭘까?
특히 섣달 그믐은 ‘까치설’이라고도 불립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윤극영 선생님의 1924년 작품 『설날』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표현인데요. 단순한 노래 가사가 아닌 공식 표준어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낱말입니다.
이 사전에 따르면 ‘까치설’은 설날의 전날, 즉 섣달그믐을 의미하는데요. 까치설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용어가 1935년 한 신문에 등장하기 전에는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국어학계에서는 ‘작은 설’이라는 의미의 ‘아찬설’, ‘아치설’이 시간이 흐르며 변화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민속학자들은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을 근거로 까치설의 유래를 설명하는데, 설날에는 외지에 사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 전날은 반가운 손님이 올 것을 알리려는 까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까치설날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3. 섣달 그믐의 전통 세시풍속
섣달 그믐날이 되면 민간과 궁중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나례(儺禮)입니다. 나례는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고 새해의 평온을 기원하는 행사로, 민간과 궁중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민간에서는 집안의 잡귀를 쫓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마디가 있는 대나무를 불에 태워 큰 소리를 내는 것인데, 대나무가 타면서 나는 ‘타닥타닥’하는 폭음 소리에 잡귀가 놀라 달아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자연 재료를 활용한 지혜가 돋보이는 풍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궁중의 나례는 더욱 장엄하고 의례적인 형태를 띠었습니다. 궁중에서는 탈을 쓰고 제금(提金)과 북을 울리며 궁을 돌았는데, 이날 특별히 허용된 것이 바로 ‘처용무(處容舞)’였습니다. 처용무는 궁중무 중 유일하게 인간의 형상을 한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 그 예술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처용무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헌강왕 시대의 인물인 처용은 자신의 아내와 역신이 동침한 것을 발견하고도 노래와 춤으로 상황을 승화시켰다고 합니다. 이에 감동한 역신이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맹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처용은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상징이 되어, 민가에서는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악귀를 물리치고자 했습니다.
4. 섣달 그믐은 눈썹 세는 날?
섣달 그믐의 또 다른 중요한 풍속으로 수세(守歲)가 있습니다. 수세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을 새우는 풍습을 말합니다. 집안 곳곳 헛간이나 곳간에도 불을 켜 놓고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데, 대청소로 몰아낸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고 복이 들어오라는 뜻에서 행해진 풍속입니다.
이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 때문에 ‘눈썹 세는 밤’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린이들이 잠들면 장난스럽게 밀가루를 눈썹에 발라 놓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엄숙한 세시풍속 속에서도 해학과 재치를 잃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믐이 가까워지면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며 집안을 정돈하고 청소를 깨끗이 했습니다. 남에게 갚아야 할 빚이나 외상값이 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고, 빌려온 그릇이나 연장들도 챙겨서 돌려보내는 등, 모든 것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새해 맞을 채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습은 “섣달 그믐이면 나갔던 빗자루도 집 찾아온다”는 속담으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날이 되면 웃어른에게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새해 복을 기원하는 세배를 드리는 데요, 예전에는 섣달 그믐에도 세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을 ‘묵은 세배’라 하는데, 한 해를 무사히 보냈음을 알리는 인사입니다. 묵은 세배는 보통 저녁식사 후 일가 어른들에게 드렸다고 합니다.
5. 섣달 그믐의 공동체 문화
섣달 그믐날의 세시풍속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담치기’ 문화입니다. 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공동체의 상부상조 정신이 깃든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풍물을 치며 마을을 돌면, 어른들이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부대에 담아주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곡식은 노인들만 있거나 환자가 있는 집, 또는 가난하여 명절음식을 준비하기 어려운 가정에 몰래 전달되었습니다.
‘담치기’는 단순한 자선 행위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입춘에 이웃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야 그 해의 액운이 끼지 않는다는 믿음을 반영한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나, 입동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모아 어른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던 ‘치계미(雉鷄米)’와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전통 사회의 공동체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된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섣달 그믐의 음식 문화
섣달 그믐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골동반’을 들 수 있습니다. 골동반은 음력 섣달 그믐에 먹는 특별한 비빔밥으로, 남은 음식은 해를 넘기지 않는다고 해서 섣달 그믐날 저녁에 남은 음식을 모아 비벼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이는 한 해의 마지막을 화합과 융합의 정신으로 마무리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두 또한 섣달 그믐의 중요한 음식문화를 대표합니다. 만두는 복(福)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여겨졌으며, 만두를 먹어야 비로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부 가정에서는 ‘복만두’ 또는 ‘보만두’라 하여 엄지 손톱만 한 작은 만두 여러 개를 큰 만두 속에 넣어 특별하게 빚었습니다. 이 특별한 만두가 자신의 그릇에 담긴 사람은 새해에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7. 섣달 그믐 관련 속담
섣달 그믐과 관련된 다양한 속담들은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섣달 그믐 날은 부지깽이도 꿈틀거린다”는 속담은 설 맞이 준비로 매우 바쁜 상황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심지어 평소에는 움직이지 않는 부지깽이조차 바쁘게 움직인다는 과장된 표현을 통해, 섣달 그믐날의 분주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시루 얻으러 가다니”라는 속담은 상황 판단이 부족한 행동을 비꼬는 말입니다. 섣달 그믐날은 모든 가정에서 설날 음식 준비로 시루를 사용하는 날이므로, 이날 시루를 빌리러 다니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실용적 지혜와 함께 유머러스한 표현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8. 현대에도 이어지는 섣달 그믐 문화
현대 사회에서 섣달 그믐의 전통적 풍속들은 많이 간소화되거나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특별하게 보내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심성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담치기’는 현대의 다양한 연말 자선행사로 이어지고 있으며,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수세의 전통은 12월 31일 밤을 ‘송구영신’으로 특별하게 보내는 현대인들의 모습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섣달 그믐의 음식 문화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동반의 정신은 오늘날 ‘비빔밥’이라는 형태로 세계화된 한식이 되어 가고 있고, 만두도 연말연시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