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33)] 흥선대원군, 고종의 실책으로 백성들의 영웅이 되다
이동진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이야기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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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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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아이러니하게도 고종이 집권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인기는 높아집니다.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시각을 고집했던 양반들의 반감을 사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내정이 탄탄해야 합니다. 왕의 지지기반은 세자시절 임금의 스승과 친우들을 바탕으로 형성되는데 고종은 원래 왕권에서 멀리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반이 부족했죠. 대원군과 고종은 원래 왕권에서 멀어져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없었어요. 고종은 가장 측근에 있는 외척세력 명성황후, 민씨 세력을 중용하며 이들에게 의지합니다.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세도정치기 보다 더 많은 정치적 폐단을 만들어냅니다. 외척세력의 집권으로 재정은 더욱 어려워지며 무리하게 개화정책이 추진되자 사대부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게다가 촉적의 매관매직과 세금수탈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지면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했던 시기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는 16세에 고종의 비로 간택되었다.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웠으며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수많은 외척세력들을 관직에 등용하면서 정치적 폐단을 만들어 냈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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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척세력은 왕의 외가쪽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왕의 가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정치적으로는 크나큰 부작용이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문정왕후는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세를 휘두른 것으로 유명하다.
명성황후 일가 역시 많은 폐단을 만들어 낸다. 세금수탈과 매관매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에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먹고살기 편했던 흥선대원군의 통치시기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동진:백성들의 불만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임오군란을 들 수 있습니다. 정부가 재정이 어렵다는 핑계로 군인들의 봉급을 1년 넘도록 주지 않았습니다. 13개월 만에 지급된 봉급 쌀의 절반은 모래와 겨였죠. 먹고살기 힘들어진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좀 더 낫게 변화해줄 수 있는 인물로 흥선대원군을 선택했습니다. 민씨 세력이 다스리는 세상보다는 흥선대원군이 다스리던 때가 더 살기 좋았다는 것이죠.
▲ 흥선대원군 청나라 유폐시절 사진. 흥선대원군은 한 달 가량 집권한 시기에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해진 고종과 명성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찾기 위해 청나라를 개입시키고, 청의 군대는 흥선대원군을 유폐시킨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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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흥선대원군은 1880년 임오군란 이후 약 한 달간 재집권을 하면서 경복궁 중건이후 건물의 보수와 수리 중단, 잡세 폐지 등 민생안정과 관련된 일부 폐단을 시정합니다. 경복궁의 부속건물을 짓고, 궁궐을 수리하는 데에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죠.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경복궁 중건으로 민심을 잃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강한 추진력과 결단성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바람을 개혁정책으로 실현합니다. 백성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들의 삶을 나아지게 도운 흥선대원군을 지지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약해진 입지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입니다. 청나라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지지하며 흥선대원군을 북경으로 잡아갑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책으로 약간의 숨통이 트인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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