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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_이야기(20)] 공일오비-그녀의 딸은 세살이에요

칼럼니스트 봉달 승인 2019.03.17 09:00 의견 0

고향 선후배에서 한순간에 프로페셔널한 관계가 되려니 나나 아가씨나 적응이 잘 안 됐다. 비록 형제만 있어 100% 확신은 하지 못하나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손이라도 잡았다가는 꼭 근친상간 하는 것 같아 주위 기자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흥을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가씨도 마찬가지. 뻘쭘하게 옆에 서서 탬버린 두드리는데 얼굴을 보니 똥 퍼먹고 우는 표정이다. 좁은 무대에서 가끔 물리적 접촉이 있을 때마다 서로 움찔움찔, 설레임이 아닌 이래선 안 된다는 거부감과 터부, 인륜 도덕 충만한 시간이었다.

3자 입장에선 세상에 별 일이 다 있다거나 가벼운 웃음거리 정도로 치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가 되면 깊은 내상이 생긴다. 미국 오기 전부터 해당 직역 service provider 방문이 지겨웠는데 이 사건 이후로 더 가기 싫어졌다. 언제 어디서 우리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다시 보거나 애초 만나선 안 될 사이인데 엮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든다.

그땐 당황해서 더 깊은 얘기를 하지 못했는데 이 기회를 빌어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띄우고 싶다.

선아야 아마 가명이겠지만 이 선배는 너를 믿는다. 가세가 기울어 학비를 갚아야 한다고 했지. 무비자 3개월 동안 바짝 땡겨야 하니 휴일도 없이 미국 전역을 순회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엘에이, 뉴욕, 아틀란타, 달라스, 그리고 귀국 전 마지막으로 들른 시카고에서 운명적 만남이 있을 줄은 너도 나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내가 7기 졸업앨범 뒤져보면 니 본명 금방 까겠지만 그냥 아름답고 찝찝한 추억으로 남기련다. 그게 벌써 12년 전이니 빚도 갚고 좋은 사람 만나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해. 서로를 잊고 각자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잘 살자. 우리 이번 생에선 다시는 만나지 말기로 해요.

공일오비의 ‘그녀의 딸은 세살이에요’가 생각 나는 밤이다.

지난번 글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시골 동네 벼룩신문에도 향응은 있기 마련이다. 요샌 뉴욕타임스와 더불어 그냥 망해가는 회사들이기는 하나 인터넷이 본격 보급되기 전엔 한인 언론들이 꽤 잘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시카고는 다른 지역보다 고학력 전문직 한인들의 이민이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나같은 평범학력() 외노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전에 이민 온 사람들은 언어 문제 등으로 현지에 완전 동화하기보다는 커뮤니티 안에서 먹고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인 언론들은 그들이 주로 소통하는 경로이자 공공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이 침체됐다고는 해도 내가 기자 노릇하던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광고도 꽤 하고 언론사 주도로 각종 행사를 많이 진행했다. 나름 기자의식을 갖고 광고주의 문제를 까기도 했는데 돈이 좀 도는 업체들은 금품이나 향응 제공으로 무마하거나 미리 약을 치곤 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냥 다 받아먹으면서 내 앞가림이나 하면 될 일이었지만 돈이랑 별로 안 친한 팔자인 관계로 나는 그런 접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슷한 성향인 기자들이 자체 정화 운동도 하고 뭐 그랬는데 사는 꼴은 나나 그 사람들이나 매한가지 아마 평생 돈 만질 일은 없을 거다. 생각해보면 각종 도움()을 주고 받는 것도 능력인듯.

*글쓴이: 봉달(필명)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에서 상사 근무 후 도미, 시카고에서 신문기자 생활. 물류업체 취업 후 관세사 자격증 따고 현재 캐터필러 기차사업부 Progress Rail의 통관부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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