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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_이야기(24)] 영주권 5만 달러

칼럼니스트 봉달 승인 2019.03.31 09:00 의견 0

선배들을 보면 내 장래가 보인다고 하던가. 미군에 입대해 넉넉진 않으나 그럭저럭 편안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고 로스쿨이나 MBA 같이 학교를 더 다녀 더 나은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미국에 좀 있다가 본사로 전입하기도 했고 일부는 경력을 살려 한국 기업 홍보팀에 채용되기도 했다. 물론 그 바닥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책 보고 공부하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기에 나도 처음엔 막연히 MBA나 로스쿨에 가볼까 했다. 교재를 사서 들여다보니 MBA는 기초부터 해야 되는데 로스쿨은 따로 공부 안 해도 LSAT 점수가 잘 나왔다. 그래서 일단 로스쿨로 방향을 잡고 먼저 신분 문제는 해결해야 하니 회사를 통해 취업영주권을 신청했다. 미국에서 언론직은 최하위 박봉이기 때문에 취업영주권 심사에서 중요한 prevailing wage 조건을 만족하기에 좋다.

천성이 귀찮은 것 질색이고 일을 미루다 막판에 몰아하는 성격이라 로스쿨도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진 않고 뭐 하나 알아보면 한두 달 뒤 또 뭐 하나 알아보고 그런 식이었다. 근데 이게 알아갈수록 답이 없는 거다. 비싼 학비는 둘째 치고 내 학부 때 성적으론 좋은 로스쿨 가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간다 해도 외노자라 litigation이 안 돼 법정에서 윽엑윽엑 하기 딱 좋아보였다.

영미계 사법체계는 한국이 속한 대륙쪽과 달라 쟁점을 서면으로 정리하지 않고 법정에서 논리 싸움을 해야 한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처럼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미국 로스쿨에 유학한 사람들의 경우를 관찰했다. 개중 언어적 능력이 뛰어나고 또 top 10 안에 드는 로스쿨을 졸업한 경우 현지 메이저 로펌에 들어가 잘 나가는 이들이 없지 않다. 태반은 어릴 적 해외 경험이 있거나 혹 그렇지 않으면 엔지니어 경력이 있는등 특수한 전문분야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나처럼 문돌이가 로스쿨 가는 경우 십중팔구는 같은 한인 변호사끼리 허울 좋은 로펌 하나 만들어 보따리장사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서울대 약대를 나와 patent lawyer면서도 이민법 하며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돈만 많이 벌 수 있으면 무슨 분야를 하든 문제가 있으랴마는 1세 변호사들의 종착지는 십중팔구 부동산, 파산, 이민법 등이고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레드오션이기에 나까지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기대할 수 있었던 건 몇년 경력이나 쌓다가 그걸로 한국 본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 영주권은 들어가 있었지만 그걸로 뭘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시 어둠의 경로 영주권 가격이 대충 5만 달러 이상이어서 그냥 포기하기엔 아까웠을 따름이다.

*글쓴이: 봉달(필명)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에서 상사 근무 후 도미, 시카고에서 신문기자 생활. 물류업체 취업 후 관세사 자격증 따고 현재 캐터필러 기차사업부 Progress Rail의 통관부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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