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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_이야기(32)] 결혼식(上)

칼럼니스트 봉달 승인 2019.04.28 09:19 의견 0

내가 어릴 때인 80년대를 떠올려보면 다세대주택 단칸방이나 반지하방에는 새로 출발하는 신혼부부들이 많이 살았다. 누구도 그런 데 산다고 불행해하지 않았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막 출발하는 젊은 부부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 그런 비율이 전체에서 얼마나 될 것인가. 둘만 좋다면 숟가락 젓가락만 들고 단칸방에서 시작하는 게 행·불행과 무슨 상관이 그리 있을까 의문이다.

물론 본인들 능력이 출중하거나 부모님들이 여유가 있어 처음부터 갖춰놓고 시작할 수 있다. 만약 신혼집 가격이 3억이라면 남녀 절반씩 부담을 하든지 각자 형편에 맞춰 누가 조금 더 또는 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느 일방에게만 불리하다면 달콤해야 할 신혼이 쓰고 떫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런 얘기해봤자 친구들은 조선을 떠난 지 너무 오래돼 현실감각을 잃었다며 조롱하곤 한다. 그래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남녀가 서로 사랑해 형편껏 최대한 공평하게 힘을 합쳐 세상에 나아가면 헤쳐나가지 못할 게 뭐 그리 있겠는가.

서울 강남 같이 예외적인 케이스를 표준으로 삼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면서 서로 협력해야 할 상대를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건 암만 생각해봐도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결혼식은 교회식으로 했다. 개별 성당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비용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관료()부터 사례비까지 정해진 것은 없으나 대충 얼마 정도 하면 된다는 게 있다. 우리는 돈도 별로 없고 해서 성당에 300달러, 신부님 수녀님 각 100달러였나 200달러였나 그렇게 드렸다. 결혼식을 꾸미는 꽃값이 500달러로 제일 컸다.

미사를 집전해주신 차호찬 신부님은 그때 막 정하상성당에 부임하셨는데 우리를 1호로 임기 내내 결혼식을 거의 매주 진행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연예인급 사제다. 암튼 나중에 교회 활동에 열심인 장모님이 돈 좀 더 내지 그게 뭐냐고 타박을 하셨지만 예산이 빠듯한 걸 어쩌란 말인가.

얼마 전 동생이 한국에서 나처럼 교회식으로 결혼을 했는데 성당이 요구하는 비용이 굉장히 쎄서 놀란 적이 있다. 장소를 빌리는 비용만 500만 원이었던가 하고 케이터링도 지정 업소만 이용해야 했는데 1인당 10만원인가 해서 부담이 됐다고 한다.

한국의 천주교가 날이 갈수록 고오급화하는 것 같아 때때로 서글플 때가 있다. 교회는 역시 세력이 약하고 박해를 받아야 제맛이다.

결혼 당시 나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외노자 신분이라 부를 손님이 많이 없었다. 직장 동료 말고는 청년회원들인데 그들은 내 손님인 동시에 아내의 손님들이기도 했다. 하여 조촐하게 치르려고 했지만 처가 부모님의 손님들만 줄이고 줄여도 100여 명이라고 한다. 이민 사회 좁은 동네에서 그것도 같은 성당에 나가는 교인들은 웬만해선 서로 다 알고 가깝게 지내기 때문이다.

어차피 많이 부를 거 그럼 나도 균형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일이 이런 데는 좋은 게, 안면만 있는 사이라도 아무쪼록 와주십사 하면 대부분 거절을 못한다. 한인 커뮤니티의 웬만한 협회장 단체장 기관장 아재 아줌마들을 다 초대했다. 체면도 있으시고 향후 언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참석해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렇게 내 손님도 한 백여 명 모으고 나니 양가 가족친지 다 합해서 300명 정도나 됐다. 시골동네 마을잔치마냥 시끌벅적하게 치렀다. 그때 사회를 봐주시거나 결혼 준비를 도와주신 선후배동료 지인분들께 지금도 많이 고맙고 감사하다.

*글쓴이: 봉달(필명)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에서 상사 근무 후 도미, 시카고에서 신문기자 생활. 물류업체 취업 후 관세사 자격증 따고 현재 캐터필러 기차사업부 Progress Rail의 통관부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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