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에필로그 : ‘플라뇌르’의 산책을 마치며(4)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77)

조연호 작가 승인 2019.05.20 10:46 의견 0

기술은 구정치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대안이 새로운 정치이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던 시대에는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 개인의 자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개인이 주체성이 있는 인간이 아니다. 통제 속에서 조종되는 개인이다.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유리 감옥’에서는 현대 자동화를 인간의 존재 문제와 연결했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섬기고, 기계적 움직임에 맞춰 몸의 리듬을 맞추기를 요구받는 상황을 보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아렌트는 노동, 작업, 행위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위 세 가지가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조건이라고 말한다)에서 말하는 노동을 떠올린다.

현재는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고 기계를 위한 로봇이 됐다(1920년도에 SF 소설 작가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단어인 ‘로봇’은 ‘노예 상태’를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기원됐다). 주객전도 현상이 현재 진행 중이다.

문제는 기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다수 알고리즘 학자들은 알고리즘에 대한 한계를 인정한다. 그래서 알고리즘 자체를 결정 내리는데 사용하기보다는 그 형식을 빌려 좋은 결정을 찾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클라우드와 빅데이터의 정치경제학’에서도 정치학적 논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빅데이터의 한계를 지적한다.

새로운 시대의 핵심이 될 기술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존재한다. 그 사용을 결정할 주체는 인간이다. 결정의 유효성은 소통, 토론, 그리고 각기 다른 의견 사이의 긴장을 현명하게 풀어가는 지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수억 달러라는 돈이 금융거래를 1000분의 52초만큼 빠르게 하기 위해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빈곤계층의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의 명분과 타당성성은 온전히 조성한 공동체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구는

지금까지 필자는 방관자에서 플라뇌르로, 플라뇌르에서 앙가주망하는 실존자로 거듭 변화했다. 그리고 앙가주망한 실존 자는 이제 새로운 공동체를 목적지로 선정한다. 개인적인 불만으로 시작한 대구 이야기는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했으며,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지방분권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자는 제언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제언이 추상적인 수준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수준조차도 제시하는 리더가 없는 상황에서 필자는 작은 소임과 책임을 미력하게나마 실천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의 인간은 기계의 로봇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부적응자로 소외될 가능성도 있다.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긍정적인 미래보다는 부정적인 미래가 더 가까워지는 거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특히, 대구의 현실은 더 심각하다. 대구의 발전을 위해 필자는 싱가포르의 사례를 제시하고,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해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대구의 좋은 공동체 조성 가능성은 과거 정신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과거로부터 올곧은 한국 정신의 원류였던, 대구 정신이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지방분권 시대에 대한민국의 정신적 수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필자도 대구 시민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경주(傾注) 할 것이며,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 한다.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 연재가 끝났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곧 한국교회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주제의 글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