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19)] 백성들의 저항과 동학(東學)운동 - 경복궁 중건 당시 조선의 국내 상황(下)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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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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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극한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들고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1862년 임술민란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이다. 임술민란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70개 마을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이다. 세금제도의 폐해,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 농민봉기의 주요 원인이었다.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단순했다. 민심을 수습하고 세금을 감면해주기를 바랐다. 농민봉기는 매번 실패로 끝났지만, 오히려 농민층의 사상적 바탕이 점점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농민항쟁으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사회적인 체제는 붕괴되었고, 조선사회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진입하게 된다.
조선 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하며 구세제민을 내세우며 반 봉건적 반외세적 종교를 창시했다. 남녀 평등사상으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
또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했다. 동학은 당시 서양세력들과 함께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천주교에 대항해 발생한 한국의 민족종교다. 흔히 천주교를 일컬었던 ‘서학(西學)’에 반발해 ‘동학’이 생겼다는 단순한 설명으로만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한국 전통의 종교적 세계관을 집대성해 심오한 사상과 교리를 갖고 있는 체계화된 종교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신종교다. 풍류사상이라는 종교성을 띤 전통적인 정신유산과 함께 오래 전부터 전래된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종합해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 사상을 내세웠다.
또한 시천주(侍天主;누구나 천주를 모시고 있다) 사상은 신분 빈부, 남녀 상관없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학의 교리는 신분제에서 벗어나려는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동학은 망가진 사회를 바로잡는 반 봉건적 성격과 서양의 침략에서 국가를 구하겠다는 반 외세적 성격을 띠는 등 186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당시 시대상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창도한지 2년 만에 경주, 영덕, 대구, 청도, 울산 등 영남과 호남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커졌고 전체 교인의 수가 3,0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 동학은 천도교로 이어지게 되며, 1920년대 천도교는 교세가 확장되었을 당시 200만명이 넘는 신도가 따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동학은 나라의 질서를 흐린다는 이유로 점차 나라에서 금지당하기 시작한다. 결국 조정은 ‘나라의 질서를 흔드는 불온한 사상’이라며 최제우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1864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죄명으로 서울로 압송되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후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의 신원회복을 위한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이는 후일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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