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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23)] 흥선대원군,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개혁을 펼치다

? 송군호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3)

김혜령 기자 승인 2018.07.18 14:45 의견 0

송군호선생님 ☞ 집권 2년간 민생안정책을 활발하게 진행한 흥선대원군은 어느 정도 백성의 삶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자, 정치적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정치적 개혁은 안동김씨가 장악하고 있던 세도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선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의지를 담고 있죠. 흥선대원군은 신하들이 모두 모인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전합니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가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남대문을 삼층으로 높이겠다.”

이 이야기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욕을 담은 말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이해해하기 보다는 문장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리’란 천륜의 도리를 줄인 말이며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는다’는 말은 천륜의 도리를 가져다 내 눈 앞에 두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조선시대에서 금기하던 종친을 관직에 등용하겠다는 의미죠.

▲ 보물 제1499-1호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화. 1863년에 그려진 초본을 바탕으로 흥선대원군의 나이 50세가 되는 1869년에 이한철과 유숙이 함께 그린 것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 편집부

해설: 성종 대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종친사환금지법’이 있었다. 왕으로부터 5촌까지 명예직 이외에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는 조항이다. 종친은 왕의 핏줄을 가진 자를 말한다. 만일 종친이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종친의 정계진출을 금지했다. 종친들 또한 자신들이 왕위를 노린다고 간주되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일부러 학문도 멀리 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또한 권력을 위협하는 인물이 될까 두려워 바보행세를 했다는 야사는 이미 많이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아무래도 흥선대원군이 많은 종친들로 관직을 채운 이유는 그간 고생을 한 자신들과 종친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추측된다.

송군호 선생님 ☞ 이어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라는 말은 당시 가장 높은 세력이었던 권력층 안동김씨와 노론 세력을 축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정계에서 권력을 독점하던 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조선후기 정치적 폐단은 세도정치에서 발생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흥선대원군은 이전에 발생했던 폐단을 막고 자신의 정치적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정계에서 안동김씨를 몰아내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마지막으로 ‘남대문을 삼층으로 높이겠다’는 말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남인과 사도세자 동정론자들을 관직에 중용하겠다고 받아들여집니다. 그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있던 세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닦아 조선을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실시하고 싶었던 권력의 교체를 위한 기초준비죠.

해설: 이 말을 할 당시에, 안동김씨 세력에서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을 했다는 야사가 있다. 이는 ‘안동김씨 세력이 자신의 권력에 네가 도전할 수 있겠느냐’ 는 도발적 의미가 담긴 말로도 보인다. 흥선대원군은 반응을 보이는 대신 안동김씨를 몰아내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고 한다. 결국 권력의 중심을 두고 권력싸움을 보인 두 세력, 안동김씨와 흥선대원군 사이의 승자는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송군호선생님 ☞ 흥선대원군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안동김씨 권력자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후원세력들을 관직에 올렸습니다. 종친을 등용한 일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안동김씨를 몰아낸 것은 아닙니다. 안동김씨 중에서도 흥선대원군을 후원하는 세력은 관직에 등용했습니다.

이어 노론 사람들 뿐 아니라 남인, 소론, 북인 등 여러 정당 사람들을 고루 등용했습니다. 그동안 한쪽 세력이 권력을 집중한 탓에 발생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죠. 양반이 아니라 중인, 천민이라 하더라도 실력이 있는 자들은 실력에 맞는 자리를 주며 고른 인재등용에 힘썼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강화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토대로 서원철폐를 실시합니다.

▲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서 살아남았다. (출처 : 문화재청) ⓒ 편집부


송군호선생님 ☞ 서원이란 원래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공부하고 대선비나 충절로 죽은 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격이 변화했습니다. ‘학파적 정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양반 권력층이 집결하는 곳으로 변질되었지요.

유학을 중요시 여긴 조선시대인 만큼, 서원은 여러 혜택을 누렸습니다. 서원이 소유한 땅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학생들은 군면제 대상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지자 양반들은 이를 악용하기 시작했어요. 개인 소유 토지를 서원토지로 등재해 세금을 피했으며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나이가 많은 사람도 학생으로 등록했지요. 이에 흥선대원군은 전국적으로 650여개의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물론 서원 철폐 당시 수많은 유생들의 반발에 시달려야 했지요. 이 때 흥선대원군은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상의 기반인 공자를 지적한 흥선대원군의 담대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해설: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을 기리기 위해 사림세력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관료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을 함과 동시에 향촌의 세력을 한데 묶는 사회적 기구역할도 담당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가면서 서원은 점점 후손들이 자신의 조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는 성격으로 변화했으며 세도정치의 지주 역할을 담당했다. 실추된 왕권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일제히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원은 유교사회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에 많은 유생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서원이 향촌민들의 재산을 착취한다는 이유로 개혁을 단행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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