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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파크] 성실한 나라, 아니 성실해봤자 소용없는 나라의 앨리스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8.04 09:00 의견 0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속 수남(이정현 분)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자기 연민도,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도, 원망도 전혀 없는 인물이에요. 그저 무언가를 꿈꾸고 그것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성실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도록 강요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이 가장 장려하는 청년상이라고 볼 수 있죠.

잠깐, ‘성실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 왜 거짓말이냐고요 그럼 힘 있는 어른들이 멘토랍시고 강단에 서서 젊은 사람들한테 하는 말을 한 번 곱씹어봅시다. 청춘들이 아픈 건 청춘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딛고 성공한 사례들은 얼마든 있으므로 구조를 탓해선 안 됩니다. 온갖 스펙에도 취직이 되지 않는 건 다 내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죠. 이에 청년들이 조목조목 반박하면, '예전엔 굶던 시절도 있었는데…'라며 '배부른 소리'로 치부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세일즈해야하는 청년들은 철저히 '수남'이 되어야합니다. 수남은 자신의 노력만큼 대가가 따르지 않아도 그냥 웃어넘깁니다. 남은 불쌍히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은 전기다리미 고문을 당해도 그냥 울고 아파하는 게 전부예요. 취업 학원에서 면접관 예상 질문과 답변이라며 뿌리는 자료들을 상기해봅시다. '수당 없는 야근을 상사가 요청해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는 '상사가 성적인 농담을 해 올 경우 어떻게 대응하시겠어요' 따위의 질문에 그들이 모범 답안이랍시고 적어놓은 것들을 떠올려보자고요. 그렇습니다. 수남은 그냥 그 자체로, 이 사회 보수가 요구하는 일종의 모범 답안인 겁니다.

수남은 착실한 젊은이면서 동시에 모든 상황에서 가장 극단적인 해결책만을 선택하는 인물이에요. 이정현이 이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연기 덕에 관객은 '주인공의 행동에 논리가 없다'며 의심하는 대신 '저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여자도 있구나'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난여름에 개봉했던 영화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 영화에 출연료 없이 출연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정현 씨 덕이죠. 개봉 당시엔 다양성 영화로서 5만 명이라는 적잖은 관객을 끌어모았고,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뒤늦게 영화를 접한 관객들은 '청룡의 선택은 타당했다'는 데 입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에 떨어진 앨리스

영화는 본론에 들어가면서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합니다. 어렵게 구한 공장 직장에서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원래 청력이 좋지 않았던 그 사내가 공장 노동 도중 손가락마저 잃게 되고, 그런 남편을 사랑하고 또 가엾게 여긴 수남이 남편의 꿈이었던 내 집 마련을 위해 정신 나간 여자처럼 계속 일합니다. 그러고도 결국엔 집을 못 사 대출을 받고, 그 집이 재개발 대상이 돼 가만 앉아 떼돈을 벌 상황이 되고, 마침내 수남은 졸지에 재개발 반대자들을 제거해야 할 상황까지 이르게 되죠.

쉴 틈이 없어요. 올해 개봉했던 그 어떤 한국 영화보다 이야기가 많은 영화에요. 어느 한 상황에 조명을 들이대 그것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영화가 아닌, 두꺼운 소설책처럼 챕터마다 굵직한 사건이 벌어지는 그런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재미는 나열한 각각의 사건들 모두 사건 자체는 현실적인데 거기에 맞서는 수남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상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데서 나옵니다. 예를 볼까요. 공장에서 손가락을 잃은 후 칼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남편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런 남편을 위해 집을 사겠다고 결심하는 건 일반의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입니다. 재개발이 돼 집값이 갑자기 뛸 형편인데, 옆 동네 사람들이 갑자기 반대 시위를 합니다. 수남의 성격을 눈치 챈 동사무소 동장은 반대자들에게 재개발 찬성표를 받아오라고 시키죠. 그리고 수남은 별 고민 없이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요. 동네 남자들한테 얻어터져가면서 말이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수남의 행동은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그 나름의 논리가 또 있어요. 잘 짜인 각본이 관객들을 설득하는 동안 관객들은 진짜로 과격하고, 이상한 건 앨리스 수남이 아닌 대한민국 자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여기는, '이상한 나라'인 것입니다.

'사회 비판'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이 지점에서 일부 언론이나 평론가들은 영화를 사회비판 코드로 읽고 싶어 합니다. 이 해석은 옳습니다. 사회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니까요. 하지만 이는 절반의 해석입니다. 수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회를 구조적으로 이해할 줄 모르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한 이 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방해하는 이들을 처단하는 데 더 관심이 있거든요. '부당한 세상을 향한 통쾌한 복수극'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그리 해석하기엔 좀 애매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애매함이야말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진짜 매력이라고 느꼈습니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 걸쳐 영화는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기호를 깔아놓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소지를 스스로 흐려버리는 상황을 자꾸 반복하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수남은 결혼을 결심한 남자친구가 청력을 잃어 자기 말을 안 듣는 남자가 되자, 귀 수술 안하면 결혼 안 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요. 이건 쌍방 간 대화와 정당한 상호 권리를 요구한다고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수남을 맘 놓고 페미니스트로 불러주기엔 결혼 후에 그녀가 하는 결정들은 결코 여성주의적으로 권장할만한 것들이 아녜요. 보고 있으면 수남에게 '그냥 남편 내팽개치고 네 인생 살아!'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다른 기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장 업무 중 장비에 손가락을 잃고 난 후 날카로운 물건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남편. 이건 아주 직설적인 거세공포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극복을 위해 애쓰는 것이 당사자인 남편이 아닌 손가락 대신 집을 사 주겠다며 밤낮없이 일하는 수남이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남편의 손가락 절단 트라우마를 통해 상징하려던 것이 거세공포가 맞는지 모호해져요.

뒤섞인 퍼즐처럼 해석의 여지들을 잔뜩 풀어둔 뒤 가능한 모든 해석들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이 괴작은 특유의 잔혹하고 기묘한 분위기와 어울려 농익은 B급 영화의 분위기를 냅니다. 요즘 같은 영화 시장에서 쉽게 맛보기 어려운 맛이죠.

청룡의 선택을 받은 이정현씨는 자신의 수상을 계기로 다양성 영화들이 좀 더 주목받았으면 한다는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습니다. 청룡영화제를 통해 이 작품에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분들도 적잖이 있더군요. 저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수작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맛이 내 입맛에 딱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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