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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28)] 경복궁 중건의 폐단, 원납전과 당백전

- 송군호 선생님께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5)

김혜령 기자 승인 2018.11.14 15:05 의견 1

송군호 선생님 ☞ 원납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걷은 기부금입니다. 원납전(願納錢). 한자 뜻 그대로 원해서 납부하는 돈인 거죠.

더 이상 경복궁 중건의 비용을 국고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흥선대원군은 재상 이하 모든 관원에게 능력에 따라 돈을 내게 하고, 백성들은 납부한 기부금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었어요. 처음에 백성들은 기부금을 기꺼이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원납전의 성격은 변질되고 말아요. 원해서 내는 돈이 아니라 원망하며 내는 돈이 되어버리죠.

▲ 원납전 자문(願納錢 尺文 ). 대구에 거주하는 전(前) 현감(縣監) 한은주(韓殷周)가 신미(辛未) 5월 11일에 영건도감(營建都監)에 원납전(願納錢) 2000냥을 납부하고 받은 자문으로 일자 아래에 이 자문을 기재해준 사람의 직책과 이름인 고직(庫直) 조영진(趙永鎭)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문서의 가운데에는 ‘봉사지인(奉使之印)’이, 문서의 우측 하단의 자문을 발급해준 사람의 이름 옆에는 ‘도감(都監)’이라는 관인이 날인되어 있다. 이렇게 원납전은 기부금형태로 고관대작 이하 백성들에게 모두 부과되었다. 처음엔 자발적 기부금 형태혔으나 뒤로 가면서 점점 의무 기부금으로 변화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해설: 원납전으로 징수된 금액이 첫해에는 거의 500만 냥 정도 되었다. 첫해에는 수월하게 걷혔지만 이후 점점 감소되었다. 원납전은 경복궁 중건 당시에만 걷었던 돈이 아니다. 사대문 공사를 할 때도 걷었으며, 경복궁 중건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이 하야할 때까지 끊임없이 징수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노동력을 강제하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며 당백전을 발행하기에 이른다.


공사가 끝난 뒤 정산된 된 금액의 기록을 보면, 727만 7784냥이 민간의 것이고, 종실에서 34만 913냥, 왕실에서 11만 냥을 내어 모두 773만 6898냥이 쓰였다.

송군호선생님 ☞ 더 이상 원납전으로 돈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세금수단으로 당백전을 발행합니다. 당백전(當百錢)의 뜻은 현재의 백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원납전의 모양과 중량은 당시 화폐로 사용되었던 상평통보의 가치보다 5~6배정도 높았지만, 상평통보보다 100배 높은 명목의 가치로 통용시킵니다.

그러니까 동전의 재료인 구리 값은 5~6원정도지만, 가치를 100원으로 매겨 발행한 후 여기서 남긴 차액을 경복궁 중건에 사용합니다. 문제는 백성의 경제가 망가지는데 있었죠.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화폐가치도 폭락하게 됩니다. 1원짜리로 거래하던 물건이 100원짜리가 흔해지면서 가치가 낮아게된 거죠. 그러면서 백성들도 어려워지고 국가 재정도 파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해설: 당백전은 실제 가치는 5원인데 비해 명목가치는 100원이었다.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거대해 백성들로부터 외면받는 화폐가 되었다. 둘의 가치가 크게 불일치하면서 불법주조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6개월 사이에 1,600만 냥이라는 엄청난 수량이 발행된다.

상평통보의 총 유통량이 1,000만 냥이었기 때문에 당백전보다 낮은 화폐인 상평통보보다 높은 가치의 화폐인 당백전이 시중에 더 많이 유통되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이로 인해 불과 2년 만에 당백전 사용이 금지되었다. 한편, 이는 백성들이 중앙정부를 더욱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 상평통보 당백전 (常平通寶 當百錢). 당시에 백전의 가치를 지녔다 해서 당백전이었으나 물가상승의 원인을 가져다주며 조선경제의 몰락을 초래한다. ⓒ e뮤지엄


송군호선생님 ☞ 당백전과 원납전만 아니라 각종 세금을 부과합니다. 결두전, 문세 등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문세는 사대문 안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돈입니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형태로 돈을 걷었으나 이후 세금으로 바뀌었습니다. 결두전 역시 기존의 전세에 덧붙여 걷은 일종의 부가가치세입니다. 이 결두전 역시 원납전과 함께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세금이 되지요.

흥선대원군은 원래 백성들과 정부 관리들의 마음을 결집시켜 왕권강화를 이루고 자신의 중앙체제를 확립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세금과 부역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면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내죠.

해설: 조선에는 국가를 위한 부역이 제도로 존재했다. 부역은 국민의 의무였으며 궁궐·도로·성벽·사원·관아 건축과 같은 토목 공사에 동원된다든가 조세·공물 운반, 수리시설, 공물생산을 위해 동원되었다. 또한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농번기를 피해 부역을 지게 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을 무리하게 추진하며 일손이 모자른 농번기에도 백성을 동원하는 등 심각한 강제 노동으로 부과되자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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