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이공학의 하모니가 연주돼야 한다

인문학은 이공학과의 연계성이 중요해 졌다. 왜냐하면, 이공계가 기계적인 활용을 넘어서서 인간과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30년이 되면 조 단위의 사물들이 연결된다고 한다. 사물 간 네트워크의 목적의 0순위가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해도 인문학은 상대적으로 그 행보가 늦다. 철학에서 4차 산업혁명을 다루기는 쉽지 않은데, 기존 철학자들이 4차 산업혁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최근에 읽은 서울대 철학과 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는가』에서도 현재를 정보 관련 언어가 판치는 세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한 인문계 출신 저술가도 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유발 하라리가 인기가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학자가 미래와 관련한 책을 썼으니 말이다. 인문학을 전공한 누군가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복제인간의 출현이 대두됐을 때 세계적인 토론이 있었다(종교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포괄적인 토론이 있어야 한다. 이공계만 존재할 수도 없고, 인문계만 존재할 수도 없다. 공존의 방법은 적절한 균형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대표적인 기관의 구성을 보면,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4차 산업혁명 위원회’(현재 1기는 해체했음) 구성원을 보면, 25명 중 16명이 이공계 출신이고, 5명이 경제와 경영 전공이며, 남은 위원들의 전공도 외교학, 지리학, 행정학 등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아날로그든, 인문학이든 현재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과 이공학의 득세 앞에 저항은 무용지물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수학이나 통계학 전공자들이라고 한다. 종합적인 판단력과 직관력이 인문학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 인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들의 핵심 주장인데, 그러한 인간은 보기에 따라서는 리처드 탈러의 『승자의 저주』나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다 보면 나오는 탈러의 ‘휴먼’이고, 카너먼의 ‘시스템 2’일 뿐이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빅데이터 책에서도, 4차 산업혁명 관련한 수많은 책에서도 인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단, 인문학적 사고만을 고착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최고의 휴식』이라는 책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쉽게 말하면 불교명상과 같은 것이다)와 뇌 과학의 연결을 다뤘는데, 실제로 둘의 연결과 관련한 논문들이 많다고 한다. 과거에 명상과 뇌 과학의 어우러짐, 혹은 공존 가능성을 생각했던 학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러나 현재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공계와 인문계의 사고방식은 분명 다르지만,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본인이 하는 일에 따라 그 비중이 다를 뿐이다. 어떤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생각할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리게 된다. 과학자였고, 예술가였고, 철학자이기도 했다. 통섭형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인문학은 소멸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인간 소설가는 존재할 것이고, 현재는 과학기술의 발달 속도에 뒤처진 것처럼 보여도 철학은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아울러 종교도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만을 견지하고, 미래를 인문학에서만 찾는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해서 현대 과학 문명을 거부할 필요가 없으며, 적절히 배우면서 대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성은 둘의 조화를 통해 창출되는 것이지, 어느 한쪽만 월등하다고 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조화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하모니’라고 하는데, 우리는 합창단이든 오케스트라든 연주가 좋을 때, 하모니가 잘 이뤄졌다고 말한다. 합창단 구성을 보자, 일단 여성과 남성이 함께 같은 연주곡을 합창한다. 보통은 여성은 소프라노, 알토로, 남성은 테너와 베이스로 이루어져 있다. 한 명의 지휘자의 지휘에 각 파트는 서로를 배려하면서 자신의 음을 소화한다. 목소리가 큰 사람은 그 소리를 작게 해야 하고, 작은 사람은 좀 더 힘을 내야 한다. 조화는 개인의 역량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라는 더 복잡하다. 다양한 악기들이 함께 소리를 내면서 연주하게 되는데, 합창보다 더 복잡하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연주를 해야 한다. 지휘자의 지휘봉과 다른 손, 지휘자의 표정과 눈빛 등을 보면서 연주해야 한다.

이공계와 인문계의 조화도 한 곡을 연주하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와 같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두 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초등교육부터 시작해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노력해야 하며 이를 기본적으로 체득하게 해야 하는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안정감 있는 교육정책인데,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