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독일 통일(48)] 사민당의 독일정책과 민족문제에 대한 태도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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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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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냉전이 고착화되면서 동서진영의 대결이 각 진영 내에 경제에 압박에 더하여 피로감을 주게 되고, 1962년 1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로 대결이 비현실적임이 드러났다. 각 진영은 내부 관리로 눈을 돌리면서 점차 현상 인정을 전제로 한 동서 해빙의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 등장한 서독의 에어하르트 총리 정부는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경제위기를 계기로 단명하게 끝났다. 에어하르트 정부에 이은 키징거 정부가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과 대연정을 통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키징거 총리는 동유럽 진영과의 화해를 제안하면서도, 이와 상충되는 재통일 명제에 기초한 동독의 국가적 실체를 부인하는 서독의 유일대표권을 주장하였다.
이미 1963년 측근인 에곤 바르가 ‘접촉을 통한 변화’ 강연을 통하여 동유럽과 동독의 현실 인정을 바탕으로 한 사민당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의 현실적인 의미와 그 방향을 밝혀주었다. 브란트 정부의 신동방정책에 앞서서 사민당의 동방정책과 독일정책의 변화와 민족 문제에 대한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민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협회(ADAV.1863년)와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1869년)이 창당되었을 당시는 독일이 아직 통일 전으로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독일 통일운동이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당시 페르디난트 라살레(Ferdinand Lasalle)가 이끄는 독일노동자협회는 통일에 관하여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고, 베벨(August Bebel)과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사회민주노동자당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통일 노선인 대독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1871년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프로이센이 프로이센 국왕을 황제로 하는 독일제국을 선포한 후 그리고 1875년 고타에서 두 정당이 사회주의노동자당(SAP)으로 통합되면서 독일민족 개념이 정치적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를 기본으로 하는 인터내셔널을 주도하면서 세계평화를 주창하고 있던 독일 사민당에게 민족문제는 극복 대상이었다.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것이 1차 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듯이 민족문제, 특히 독일 민족문제는 1차 대전 전후의 유럽 평화와 안정을 흔드는 제일 큰 요인이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860년대 이후 중부유럽을 무대로 한 전쟁은 모두 독일민족 문제와 관련된 전쟁이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사민당은 1925년 하이델베르크 당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에서 민족문제를 극복하고 유럽 대륙의 이익연대를 얻기 위하여 유럽합중국(Vereinigten Staaten von Europa) 창설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런 선언이 허구의 민족주의를 내세운 민족사회주의(나치)의 발흥이나 2차 대전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2차 대전 후 재건된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쿠르트 슈마허의 지도 하에 강력한 반공산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1954년 슈마허 사후 사민당 내에서는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는 중립화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1951년에서 1952년까지 4차례에 걸쳐서 소련의 스탈린은 중부 유럽에 비무장 평화지대 설치 제안을 내용으로 하는 소위 평화노트를 공개하였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도 내부 권력투쟁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소련은 평화 공세를 계속하였다. 이런 평화공세는 사민당 내에의 중립화 평화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했다.
더욱이 1955년 중립화를 전제로 4강국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4강국의 점령을 종료하고 오스트리아의 주권이 회복되자, 서독의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에 고무되었다. 이런 시점에서 1958년 서독 연방의회는 서독 내에 미군의 핵무기 배치 동의를 결의하였다. 이에 사민당은 서독 연방군의 핵 무장 저지와 서독 내 미군 핵무기 철수를 목표로 한 반핵투쟁에 나섰다. 1958년 4월 함부르크에서 15만 명이 참가한 반핵시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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