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독일 통일(46)] 동독과 서독, 경제적 협정을 두고 입장차를 보이다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7.14 11:34 의견 0

이렇듯이 동서독 간의 인적 교류가 단속적이었던 데 비하여 교역은 계속되었다. 1949년 동독 국가 창건 하루 뒤인 10월 8일 동서독 교역에 관한 프랑크푸르트 협정(Frankfurter Abkommen)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그 후 협상 촉진을 위하여 1951년 9월 20일 베를린 협정(Berliner Abkommen)으로 대체되었다. 이 협정은 매년 상품 목록만 협의하기로 한 항구적 조약 틀로 1960년 8월 16일 개정 후 동독 붕괴 시까지 효력을 유지하였다.

 

아데나워 총리의 기민련은 서방 연합국 특히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점령 기간 중 독일 전체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유지해오던 서방, 특히 미국의 입장에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분단국가 체제를 명실상부한 두 개의 주권국가 체제로 전환하여 독일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의심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하여 동독을 인정하지 않고 서독의 유일대표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아데나워 총리의 서독 정부는 어떤 환경에서도 동독에게 그 협정을 국가 승인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또한 이 협정의 효력 범위에서 서베를린이 제외될 수도 있었다. 서베를린은 서독에 속하지 않아서 서독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여 서부 마르크(DM-West)와 동부 마르크(DM-OST) 통화지구 간의 협정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 협정에 대하여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정부는 전체 독일 국민을 위한 서독과의 경쟁에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동서독 경제관계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편으로 이는 동독에게 부족한 상품을 확보하여 생산부족을 피하며, 주민의 공급상황을 개선하며 이를 통하여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외화 절약 방안을 열어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동독은 국제법상 국가 승인과 관련하여 독일정책에서 경제관계가 가지는 결정적인 기능에 주목하였다. 조약에서 베를린협정-행정협정-을 외교상의 조약으로 변경하려고 노력하였다. 국제법상 조약은 정의상 국제법상 대등한 두 조약 당사자를 전제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서명자 형식이 ‘통화지구’가 아니라 공식적인 국명인 ‘독일민주공화국’이기를 원했다.

 

협상에서 동독 외무부는 거듭해서 동서독 교역 위탁사업단(TSI)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정부 부처 수준의 협상을 요구했다. 더욱이 동독 측은 동서독 간의 사업(교통 및 통신 기반시설)을 다룰 정부 합동 기술위원회를 요구했다. 동독은 무엇보다도 외국으로서 주권국가로 표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동독 기업대표가 예를 들면 서독에서의 산업전시회에 ‘독일민주공화국’ 명칭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법률 형식 수준에서는 소기의 효과가 실현되지 않았다.

 

협상은 동독의 외무부 대표와 서독의 경제부 대표에 의해 진행되었다. 국가 승인 문제로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와 직접 협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동서독 교역 위탁사업단(Treuhandstelle für den Interzonenhandel. TSI)이란 기구를 만들었다.

 

형식상 독일상공회의소의 산하 기구로 동독과의 협상 중에 이의 대표는 서독 경제부의 지시를 받았다. 동서독 교역 위탁사업단(TSI)은 기능상 사회주의의 대외무역 전담기구에 해당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연방 주 혹은 기업과 거래하려는 동독의 시도를 서독 경제부는 강력하게 막았다.

 

협정의 주된 내용은 거래할 상품 내역을 매년 합의하기로 한 것이었다. 지급은 독일 연방주 은행(Bank deutscher Länder)과 독일연방은행(베를린) 계좌를 통해 집중적으로 수행되었다. 여기서는’청산단위(Verrechnungseinheit. VE)’가 지급수단으로 정의되었다. 1 청산단위는 수학적으로는 1 서독 마르크와 1 동독 마르크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합의된 목록 상의 상품 가격이 서독 마르크 환율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1 청산단위(VE)는 사실상 1 서독 마르크의 가치와 같았다.

 

그리고 상품 구입과 공급의 격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청산용 융자제도인 스윙(SWING, Verrechnungskredit)이라 불리는 일종의 대월제도(貸越制度)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동독만 이용했으며, 무이자로 이루어졌다. 스윙은 동서독 간의 대금결제의 수단 그 이상이었다. 서독은 이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동독에게는 경제적으로 매우 유용한 제도였다.

 

서독은 이미 1951년 3천만 VE(청산단위) 규모의 대월을 승인했으며, 이는 1958년까지 단계적으로 2억 VE까지 늘어났다. 서독 정부는 1968년 12월부터 스윙제도를 ‘연동’시킴으로써 전년 동독 수출의 25%까지 대월이 가능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2억 VE였던 대월 한도가 이듬해에는 3억6천만 VE로 늘어났고, 1975년에는 7억9천만 VE에 이르렀다. 그러자 1976년에는 다시 8억5천만 VE로 대월 한도를 고정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그해 말 동서독 간 교역이 서방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금수조치에 포함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객관적으로는 포함되어야 하지만, 서독 정부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대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개념 정의상 금수조치는 대외무역에 해당하는 것이며, 국내 교역인 동서독 간의 교역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독 경제부는 당연히 금수조치 관점에서 동독으로의 물품 인도에 대한 엄격한 감시를 약속하였지만, 의도적으로 준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독은 동독 상품에 대하여 통상 14%의 부가세를 부과하지 않아서 동독 상품의 서독 내에서의 경쟁력을 보장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