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87세에 달한 아데나워 총리는 <슈피겔>지 사건으로 1963년 사임하였다. 이는 동방정책에서 ‘힘의 우위 정책’ 시대가 끝났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이어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설계자이며 서독의 경제기적을 지휘한 루트비히 에어하르트 총리 정부가 출범하였다.
아데나워 총리가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던 <슈피겔> 지 사건은 1962년 10월 10일자 <슈피겔>에 실린 ‘제한된 방어 태세’라는 기사가 발단이 되었다. ‘펠랙스62’라는 이름으로 그 해 가을에 실시된 나토와 독일군의 대규모 합동 군사작전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독일 국방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한 기사였다.
여기에 대하여 검찰이 잡지사를 수색하고 발행인 등을 체포하고 아데나워 총리까지 연방하원에서 슈피겔에 대해 “반역의 징조를 본다”고 말하였다. 내막은 당시 차차기 총리를 노리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Franz Joseph Strauss) 국방장관과 슈피겔 발행인 아우크슈타인(Rudolf Augstein)의 오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거나, 기사 출처가 소련이었다는 등의 내막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무튼 이 사건은 언론의 자유 문제로 서독 전역을 강타하였다.
엄청난 시위가 벌어지고 언론과 사민당은 정부와 슈트라우스의 대응을 나치의 검열에 비유하면서 ‘정부가 법치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연정 파트너 자민당이 장관들을 철수시키면서 물러나자 아데나워 총리는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장관을 교체하고 자민당을 회유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지만 결국 이를 계기로 아데나워 총리가 물러났다. 어쩌면 극단적 대립 시대의 해프닝일 수 있다.
이렇게 출범한 에어하르트 총리 시대의 서독 경제는 1965년 말부터 급격한 경기둔화가 찾아왔다. 1966년 실질 경기 성장률이 2.3%로 떨어졌다. 1967년에는 0%로 더 떨어졌다. 이에 따라 재정적자가 확대되었다. 이에 대한 정책으로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은 재정지출 축소를 주장하고, 에어하르트는 증세 정책으로 재정적자를 줄이자고 하였다. 양당 간에 절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자민당 장관이 정부에서 철수하였다. 결국 에어하르트는 11월 30일 사임하였다.
에어하르트 총리의 사임은 표면상으로는 서독 경제 악화와 그 대책을 둘러싼 연립여당 자민당과의 정책 불화지만, 한편으로는 동서진영의 세계정책 변화에 따른 서독 정치의 새로운 조건 형성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서방 진영의 종주국 미국의 입장에서 데탕트라는 새로운 흐름의 도래에 대비한 새로운 동방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종래의 대결정책을 고수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동서 냉전의 또 다른 최전방인 동아시아의 한국에서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 살펴본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대한민국 즉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의 기치 아래 북한의 현실적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면서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에 의한 통일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데나워의 서독의 기본입장 역시 동독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동독 지역의 자유선거를 재통일의 기본전제로 요구하면서 힘의 우위에 의한 재통일을 정책을 고수하였다. 미국의 세계정책 전환기에 서독의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권교체와는 달리 남한은 4.19 혁명과 5.16 쿠데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서독의 에어하르트 후임인 키징거(Georg Kisienger) 총리는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통해 등장하였다.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빌리 브란트 그리고 전독부 장관을 사민당의 헤르베르트 베너가 맡았다. 키징거 총리 자신이 데탕트를 지향하는 동방정책을 제시하고, 이미 1963년에 ‘접촉을 통한 변화’를 내세운 사민당의 브란트와 베너가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키징거 총리 정부는 기민련의 종래 노선에서 멀리 나가지 못했다.
키징거 총리의 동방정책 자체도 당의 종래 노선과 타협적인 내용인데다 그 자신이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였고, 1940년 징집을 피하여 외무부에서 일하게 된 후 방송국 부국장으로 근무하였던 나치와의 연루 등 투명하지 못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당내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지 못하여 기민련/기사연의 종래 당 노선과 부딪히면서 새로운 동방정책을 실현에 옮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1965년 선거강령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민련은 모든 독일 국민의 자유와 자결권을 위하여 투쟁한다. 독일의 재통일을 위하여 투쟁한다. 베를린은 전체 독일 국민의 수도다. 기민련은 냉전에 반대하며, 동부의 이웃나라와 화해를 원한다. 기민련은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원한다. 세계평화는 국제법과 인권의 보편적인 존중을 의미하며 독재의 종식이다. 독일의 재통일이 부정되는 한, 연방공화국은 전체 독일 국민에 대한 배타적인 대표권을 주장하여야 한다.
결국 키징거 정부가 현상 인정에 바탕을 둔 새로운 동방정책을 내세운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주면서 서독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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