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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주년(5)] 피기도 전에 꺾인 민주주의

새한일보 정세민 기자 승인 2020.05.10 20:51 의견 0

4.19 혁명의 전개과정은 4.19 59주년인 2019년 4월 19일부터 24일까지 4회에 걸쳐 진행한 [4.19-59주년 연재기사]에서 설명했기에 생략했다. 지난 기사는 다음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편집자 주)

[4.19-59주년 연재기사]
    http://www.sisa-n.com/List.aspx?TEXT=4.19-59%EC%A3%BC%EB%85%84

 

사진은 1963년 12월 17일 거행된 제5대 대통령 취임식 장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선거라는 절차를 통하긴 했지만, 2위인 윤보선 전 대통령과 비교해 유효득표율 1.4%라는 저조한 차이였다. 군부가 권력과 재원을 확보한 상태에서 치른 선거였지만 국민의 지지가 낮았던 이유는 군부의 부패에 대한 실망 때문이기도 했다. (출처: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이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 국민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했으며, 4.19로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역사엔 우연이란 없는 것일까? 이승만 박사는 3.1운동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4.19혁명으로 하야한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역사에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 수 없다. 어쩌다가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남았어야 할 이승만은 불의에 항거하는 국민의 원성에 하야해야만 했던 독재자가 됐을까?

3.15 부정선거가 시발점이 되어 항거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승만 체제의 전복을 가져온 4.19혁명의 의미를 되새길 때,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형성된 ‘반공전시체제’를 붕괴시킨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혁명이라는 사실도 염두해야만 할 것이다.

4.19 이후 혁신세력은 분단체제가 독재체제를 탄생시킨 데에 대한 반성으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고통인 분단을 해결하고자 남북학생회담을 준비했다. 학생들은 통일의 꿈에 부풀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와 같은 통일을 염원하는 구호를 외쳤다.

◇여전히 강한 반공이데올로기와 제2공화국의 실패

그러나 이는 국가체제를 뒤흔드는 위험한 주장으로 인식되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유와 민주의 가치와 통일의 염원이 뒤로 물러나게 되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극우반공체제는 4월 혁명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과도정부의 수반 허정이나 이후 민주당 정권의 장면 총리나 아니 우리 국민 전체도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북한에선 김일성유일체제가 점점 강고해지는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제2공화국은 데모로 시작해 데모로 끝난 혼란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혼란 속에 질서를 잡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의 염원은 혁명으로 열린 민주주의 광장에서 각계각층에서 빗발치는 정치사회적 요구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 안에서 올곧게 모아내는 일이었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4월 혁명 이후 대한민국은 허정 과도정부를 지나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게 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신·구파의 갈등으로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제2공화국 시대가 열린다.

제2공화국에 들어서 내각책임제가 실시되고, 경제제일주의가 표방됐지만 부정선거책임자나 부적축재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4월 혁명으로 대통령이 하야했지만 기존의 사회질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결국 반공을 국시로 하는 5.16 군사쿠데타를 야기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SFgb1mUAVI

◇의외로 환영받은 쿠데타 세력

4.19혁명으로부터 1년 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18년간 철권통치를 자행한 일은 익히 아는 바이다. 박정희 이후에도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30년간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올렸지만, 역으로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을 경험했다. 왜 4.19혁명이라는 빛나는 민주주의의 성취가 1년도 안 되어서 30년의 군사독재로 이어진 것인가?

4.19혁명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무능력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장면 총리는 1960년 5.16 군사쿠데타 소식을 듣고 “올 것이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시 군은 미군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엘리트 장교로 충원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박정희는 소장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등장에 침통해 한 이들은 4.19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지도부와 민주인사, 의식 있는 시민 정도였을 뿐, 대부분 국민은 환영했다. 더 이상의 무질서를 견딜 수 없었던 일반 국민들은 군부가 정권을 잡고,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내세우자 질서가 회복되고 사회가 안정되리라 믿었다.

지금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하에서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지고 북한을 앞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정권의 과오에 상응하는 공로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말살한 죄상은 커서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은 선거철마다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는 악습이 유산으로 남겨졌다.

◇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제적 현실 

한편, 미국에 의존해야하는 현실도 지속되었다. 4월 혁명 후 허정 과도정부 수반이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였고, 이를 통해 6월 19일에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이끌어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음을 알려 대내외적으로 체제가 존속가능함을 증명해야 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실시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제2공화국 당시 장면 총리를 통해 준비됐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려 했고, 국방비를 삭감해서까지 경제개발 재원을 활보하려던 계획도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경제개발은 이후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몫이 된다. 그런 차원에서 4월 혁명은 민주주의라는 광장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우리 국민을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굶주림에서 해방시키진 못했다. 민주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정치적 권리는 경제적 궁핍이 해결되고 나서야 주장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게 만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C_OshAPAeM

◇4.19혁명의 좌절에도 민주주의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연된 민주주의, 피기도 전에 꺾인 꽃이 되어버린 4월 혁명은 우리 국민 각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잘 살아보세”라는 절박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격렬하게 분출됐다.

또한 1987년 6월 항쟁은 국민의 민주적 권리인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사건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온 국민이 저항하는 또 한 번의 역사를 남겼다. 그런 측면에서 2016년 겨울부터 시작된 촛불혁명과 탄핵으로 박근혜 정권이 무너진 사건은 1960년 4월 혁명의 민주정신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설명해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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