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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주년(4)] 이승만 장기집권 형성과정

새한일보 정세민 기자 승인 2020.05.05 19:02 | 최종 수정 2020.05.06 01:06 의견 0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이 베푼 환영회에 참석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령.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사진출처: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

1919년 3.1혁명을 통해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했다. 당시의 이승만은 이미 국제적인 인물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조선이 낳은 천재라 표현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비타협적이며 독선적인 정치적 행보 때문에 상해임시정부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결국 하와이에 돌아간 그는 미국의 협조와 지원 없이는 해방을 맞이할 수 없다는 외교협상 노선을 걷게 되고 상해임시정부와도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했지만, 해외에서 쌓은이승만의 명성은 당시 조선인민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국가를 건설하는데에도 이승만의 역할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권력의지가 유별나게 강했고, 자신을 늘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소개했다. 하와이에서 한인단체를 운영하면서도 갈등과 분열을 일삼았고 결국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야 만족할 수 있었다. 이런 이승만의 성격은 이후 해방공간에서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미·소가 그은 38선: 분단의 시작과 이승만의 재등장

이승만이 의지할 수 있었던 세력은 미국밖에 없었다. 국내는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도 귀국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에 정치적 기반에 없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해방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미군정 3년 동안 차례차례 정적을 제쳐 나가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건설된 직후, 조선의 청년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독립을 꿈꾸게 된다. 레닌이 이끄는 소련이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김규식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의 해방을 모색해보았으나 소련 역시 제국주의의 또 다른 변형임을 알게 된 뒤 실망하게 된다. 이승만은 이미 구한말부터 러시아의 침략주의를 간파했고, 이른 시기부터 반소반공 노선을 걷게 되는데 이는 그가 미군의 지원을 얻어 해방 전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46년 미군정을 자문을 위한 민주의원 개회식 장면. 서있는 사람이 당시 의장이던 이승만. 왼쪽은 부의장 김규식, 오른쪽 부의장 김구.  (사진출처: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 이북엔 소련군이 주둔하고, 이남엔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그어진 38선은 향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미군은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를 내걸며 3년간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 3년은 남한뿐만 아니라 향후 동북아 정세 전반을 좌우하게 되고, 사실상 지금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이 최후승자로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데에는 무엇보다 미국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 신탁통치 찬반논란 속에서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쳤던 우파의 양대 거두 이승만과 김구가 반탁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부각됐다. 마지막엔 친미반공 노선을 추구하는 이승만이 김구를 누르고 권력을 잡았다.

미군은 조선인민의 정치적 결사 및 단체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 진영도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입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태평양사령관인 맥아더의 지원으로 미군전용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이 장면은 향후 해방공간에서 정부수립까지 민족지도자들의 권력투쟁에서 이승만이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미군의 지원만으로는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는 없었다. 김구와 김창숙 같은 민족주의 진영이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 좌익진영에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여운형, 남로당의 박헌영 등이 38선으로 인한 민족의 분단에 강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의 전폭적 지지로 38선 이북에 공산정권을 세운 김일성은 좌우합작이라는 기만적 전술로 이남의 지도자들을 미혹하려 했다.

◇역사적 과오로 남은 친일미청산, 제주4.3 등

이런 와중에 이승만이 기댈 수 있는 세력은 미군정도 인정하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친일 엘리트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식민 지배체제 속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국정 운영을 경험한 이들이다. 친일관료로 매도되는 이들은 일제에 부역했지만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에겐 파워엘리트로서 점령지 이남을 관리하는데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친미주의자 이승만에게 친일관료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기반을 보충해줄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국제연합으로 이관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이상은 남한에서만 현실화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사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국회를 구성한 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기까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은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이 엄존했음을 보여준다.

민족의 분단을 용납할 수 없었던 이들은 항쟁의 불길을 올렸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하며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이 여파로 ‘여수·순천반란 사건’까지 일어나 미군정과 이승만은 고심에 빠지게 된다.

제주4.3을 좌익의 폭동으로 시작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4.3이야 말로 미군정이 남한에서 어떤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전후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얼마나 처참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명령을 받은 제14연대가 항명하면서 발발한 여수순천반란사건도 통일민족국가를 염원하는 민중의 염원이 반영된 역사의 한 장면이다. 결국 끔찍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출처: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대한민국 정부수립-미군정 철수-6.25전쟁 

결국 5월 10일의 총선거로 국회가 구성되고 그해 7월 17일에는 헌법이 제정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독립국가 건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때 이승만이 사용한 ‘민국 30년’이란 연호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은 3.1혁명의 결실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미군정이 철수하면서 발생한다.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해오던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을 기점으로 전면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손실, 그리고 산업시설 파괴를 낳았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변해 아직도 한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은 지속하고 있다.

이승만은 6.25전쟁을 통해 강고해진 반공체제를 활용해 장기집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승만의 반소련·반공산주의 노선은 오랜 정치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다. 미군정기 3년은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6.25전쟁은 그에게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결국 4.19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우리의 민주주의는 긴 겨울을 맞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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