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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17)] ‘큰 은혜’와 동시에 ‘사나운 재앙’을 주는 바다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노인과 바다> ①편 - 어니스트 헤밍웨이(1954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7.22 19:13 | 최종 수정 2020.07.22 19:28 의견 0

문학은 독자가 해석한다. 독자의 상황에 따라 해석하면 된다. 작가의 감정과 그 시대의 분위기 등을 살펴서 해석하는 건 전문가들의 몫이다. 책은 쉽게 읽으면 된다. 물론, 그렇게 읽으려 해도 쉽게 읽히지 않는 책도 많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책은 해설서를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툼한 책을 일독하고 난 후 느낀 점이 비록 티끌만큼만 남았더라도 독자는 성공한 것이다. 전공자들만큼 이해하기는 어차피 쉽지 않다. 그러나 그 티끌이 태산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꾸준히 읽으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7qzbthhXUk

◇왜 노인과 바다인가?

작품을 읽다 보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노인과 고기다. 작가가 워낙 낚시를 좋아했기에 소설은 낚시꾼들만이 알 수 있을 정도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기력도 쇠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기가 일쑤인 노인이 먼 바다로 나가 고기와 사투를 펼친다.

“이놈, 네가 나를 죽일 속셈이로구나, 하고 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너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겠지. 그런데 이 친구야. 나는 지금까지 너처럼 거대하고. 너처럼 아름답고. 또 너처럼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처음 봤구나. 자,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이려무나. 어느 편이 상대방을 죽이건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노인과 바다> 중

사투라는 표현이 적당한데, 동시에 경외감과 동지애를 보여준다. 죽거나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인은 고기를 단순한 어획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마치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헤밍웨이 버전’을 보는 듯하다. 물론, 배의 규모도 다르고 대상을 쫓는 기본적인 입장도 다르지만 거대한 대양 가운데서 사투를 펼치는 커다란 물고기와 인간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유사하다. 어쩌면 멜빌의 ‘모비딕’은 헤밍웨이의 ‘큰 고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품은 ‘바다’를 쉽게 잃어버리게 만든다. 모든 배경이 되는 바다보다는 ‘노인과 고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어쩌면 이게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함은 보지 못하면서 근시안적인 상황에 눈을 맞추는 인간의 본능이자, 무지함.

◇바다는 고요함 속에서 등장한다

“노인은 항상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다. 바다는 큰 은혜를 주기도 하며, 모든 걸 간직하고 있기도 한 그 무엇이었다. 비록 바다가 사나워지고 재앙 이 닥쳐오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노인과 바다> 중

고기와 마주치기 전 노인이 생각한 부분이다. ‘큰 은혜’와 동시에 ‘사나운 재앙’을 주는 바다다. 그리고 이런 양면성을 가진 바다를 노인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변덕을 의미하는 것일까?(헤밍웨이의 여성 편력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연을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일까? 당연히 후자다.

다시 <모비딕>을 가져와 보자. 거대한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포경선과 흰고래의 싸움, 인간은 단 한 마리의 고래와의 사투에서도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 하물며 거대한 바다에서 태풍을 마주한 범선은 대자연의 가공할만한 위력 앞에 오직 목숨만 간절히 애원할 뿐이다. 바다를 볼 수 있는 눈은 목전에 고기가 없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오직 고요함 가운데 바다를 느낄 수 있다.

“태풍이 오면 며칠 전부터 하늘에 그 징조가 나타난다. 바다에 나가 있노라면 그것을 금방 알게 된다. 육지에서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 데서도 태풍의 단서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 중

하지만, 눈앞에 고기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태풍이 올 징조는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직 고기에만 몰입하기 때문이다. 2000년도에 <퍼펙트 스톰>이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 목표치를 달성했으나, 큰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고 모든 어부도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미리 태풍을 예측했다 해도 목전에 큰 고기가 보이면 그 확실에 가까운 경험을 포기하고 당장의 이익에 운명을 건다. 바다가 위험을 예고해도 인간은 위험을 운으로 돌리려 든다.

◇결국, 패배

노인은 고기를 잡았다. 사투 끝에 잡았기에 그의 만족감은 커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고기를 죽였다는 것은 정말 안된 일이었어.” <노인과 바다> 중

사투를 벌였던 고기에 대한 연민일까? 잠시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리고 승리를 정당화한다.

“네가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노인은 생각했다. 너는 자존심 때문에 그 고기 놈을 죽였으며, 네가 어부이기 때문에 죽 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너는 고기가 아직 살아 있을 때도 그놈을 사랑했고, 또 한 그놈이 죽은 후에도 사랑했다. 만약 네가 고기를 사랑한다면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니 더욱 무거운 죄가 될까, 그것은?” <노인과 바다> 중

그러나 소설은 <노인과 고기>가 아니다. 어떤 일에 죽을 만큼 몰입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 따위를 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당장의 몰입으로 얻은 가벼운 승리는 결론적으로 패배로 가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소설은 이제부터 시작한다.  (계속)

 

 

[필자의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회고]

거의 2019년부터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위기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을 읽어 나가며 대표작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헤밍웨이는 이런 흐름과 거리가 있고 특별한 이슈와도 상관없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상황과 관련 있다. 아버지께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고, 동시에 암 진단도 받으셨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여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속에 선택해 읽은 작품이다.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다. 젊은 시절에는 잘 나가셨다고 한다. 남들이 누린 것들을 충분히 누리셨다고 들었다. 그러나 중년 이후의 삶은 쉽지 않으셨다. 특히, 말년에는 더 고생하셨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셨다. 자식들에게 부담 지우기 싫어서 더 힘들게 사신 것도 잘 안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고 나니 일찍 죽음을 준비해 오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인생의 바다를 잘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러나 고기 앞에서는 바다를 잠시 잊으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바다를 너무 잘 알기에 더 열심히 큰 고기를 잡으려 하셨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을 인생 최선을 다해 살자!’라고 다짐하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마지막 에너지를 다해 버티셨다. 모든 장기가 망가지고, 체중도 건강했던 시절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임종 이틀 전 온 가족을 마주하실 수 있었다. 모든 가족은 각자 다른 시간에 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 인제 그만 끈을 놓으세요” 

2020년 6월 8일 오전 9시 24분 아버지 께서 임종하셨다. 마지막 에너지의 한 방울까지도 다 소모하시고 돌아가셨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왜 그렇게까지 생명줄을 짜내듯이 버티면서 놓지 않으셨는지. 한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본다면, 아버지의 원래 삶의 모습과 임종까지의 과정이 닮았기에 지난 50일 동안 힘겹게 버티신 게 조금 이해된다.

아버지께서 그나마 기력이 있으셨던 시공간에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옮겨본다.

-오늘 한의원 갔더니, 열이 많다고 하네요. 상체가 잘 굳는 체질이라고 합니다. 잘못하면 풍이 올 수도 있다네요. 그래서 상체 살을 빼라고 하네요.”
“그렇게 하려면, 닭고기를 덜 먹어야 해!”
-그래요? 그러면 이제부터 한 달에 한 번만 치킨을 먹도록 하죠.”

물론 닭고기만 덜 먹으라는 말씀이 아니었다. 지금 식생활 습관을 바꾸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어쨌든 마지막 말씀이 치킨을 덜 먹으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필자는 그 말씀을 유언처럼 받들고, 한 달에 한 번만 먹고 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치킨 따위는 조금 덜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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