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그대로읽기(16)] 과연 복제인간에게 영혼이 있을까?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2017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7.10 23:14 의견 0

◇복제인간

복제 양(돌리)이 등장한 1990년대(1996년)를 떠올려 보자. 곧 인간도 복제될 것인 양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당시 복제인간에 대한 찬반 중 반대편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인들–신이 온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는–이 주로 반대했는데, 생명의 창조는 신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당시 종교인들의 반대 논리는 생명의 중요성보다는 ‘영혼’에 초점을 맞췄다. 신을 믿고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종교인들은 ‘신의 피조물 인간’의 영혼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창조주가 아닌, 인간이 창조한 복제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종교인들의 대답은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과연 복제인간에게 영혼이 있을까?

이 질문이 소설 속에 밑그림을 깔린 작가의 의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기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복제인간도 영혼이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혹은 “그깟 영혼이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복제인간에게 생명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그들의 장기(臟器)로 ‘근원자’들이 목숨을 더 길게 연명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를 보내지 마>를 처음 읽을 때는, 복제인간의 영혼 문제를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삶, 생각, 행동 등을 통해 그들이 이미 영혼–정신–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게 받아 들이게 된다. 그들은 토론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사랑과 우정을 느낀다. 아울러 예술적인 작품으로 정신세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

“선생님은 로이(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복제인간 3명 중 한 명이다)한테 그림이나 시 같은 건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고 했어. ‘영혼을 드러낸다’고 말이야.”  <나를 보내지 마> 중

그러나 일반적인 ‘근원자’-복제인간이 아닌 인류–들은 복제인간이 인간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라고 느끼는 자체를 거부한다.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지도 않고 해를 끼치려 하지도 않지만 우리같은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고 우리의 손이 자기들의 손에 스칠까 봐 겁에 질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나를 보내지 마> 중

◇욕망이 불러오는 힘

자크 라캉은 『욕망 이론』에서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발전하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한다. 소설도 이런 이론을 따른 듯하다. 복제인간의 등장은 장수(長壽)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그래서 근원자는 복제인간을 동물처럼 사육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의 장기를 스스럼없이 빼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이미 인간의 우열을 나눠서 노예로 삼은 경력이 있다. 지금도 못 사는 국가의 사람들을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미국에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인도에도 카스트 제도가 버젓이 존재한다. 중국은 어떠한가? 한족 이외의 민족은 그들의 삶에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냉대와 하대도 다를 바 없다. ‘제노포피아(Xenophobia)’로 가득한 세상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보다 못하고 다른 사람’이어야 양심의 가책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나?”  <나를 보내지 마> 중

그리고 이런 사고의 관성은 일말의 양심의 저림도 사라지게 만든다. 양심이 욕망의 관성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복제인간을 출현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아야만 욕망을 계속 충족할 수 있다. 그래서 ‘근원자’는 복제인간을 ‘사육’한 것이다.

“클론들은, 중략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  <나를 보내지 마> 중

(예스24 제공)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복제인간과 관련한 영화, 그리고 다른 소설들을 보면 무작정 희생당하던 복제인간이 저항한다. 그러나 본 소설은 복제인간에게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 말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전자 조작이라도 당한 것처럼 장기 기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최소 2번에서 4회 이상까지 진행하는데, 살아있는 생명체의 장기를 떼서 근원자에게 기증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아울러 기증을 통한 만족감도 없다. 오히려 미루고 싶어한다. 

“소문에 따르면,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운영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낸다는 거야. 그 결과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간 함께 지낸 다음 기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야.”  <나를 보내지 마> 중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사랑’이 이러한 고통스러운 기증을 미룰 수 있다는 소문이 돈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었다. 사육 대상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사육은 종식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복제인간들도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은 있지만, ‘저항’이 없다. 그대로 순응한다. 

저항을 묘사하고자 했다면, 전쟁을 선포해야 하고 승패의 시나리오를 써야 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 작가에게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복제인간을 근원자의 종속물로 규정했기에 저항을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나를 보내지 마> 중

작가는 복제인간의 근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인간쓰레기’를 복제해서 그 장기를 받아 챙기는 건 오히려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내가 너의 더러운 장기를 써 주는 거잖아!”라는 고함이 들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작가는 교묘하게 선타기를 즐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체 소설에 등장하는 아슬함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줄타기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광대들의 줄타기를 보라. 떨어질 듯, 하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의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들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게 기술이고 능력이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도 마찬가지다. 위태하지만, 줄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다. 소설은 ‘복제인간’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주인공 모두 복제인간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실을 개선하거나 개혁, 혹은 혁명하려 하지 않는다. 복제인간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영혼 있음’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제인간의 삶이 바뀌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주인공 중 한 명인 토미가 네 번째 기증 후 삶을 마감한다는 사실에 끔찍함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느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장면은 단 한 줄도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분노’하지 않게 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수긍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이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사육된다면 ‘학생’들 역시 일반인들처럼 지각 있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어.”  <나를 보내지 마> 중

위 문장을 보자. 작가는 복제인간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육’과 ‘지성적인 사람’ 사이에서 작가의 줄타기를 볼 수 있다. 

혁명이나 무자비한 억압이 소설에 있었다면, 터프한 결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여운은 남았을까? 작가는 카타르시스가 아닌 여운, 그것도 아슬아슬한 여운을 제공하면서 독자가 혼자만의 토론을 계속 유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 마디 던진다.

“난 작가야, 결정은 당신들이 해!”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