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인터뷰] “노년의 기억을 통해 현대사의 단편을 기록한다” - ‘어르신 자서전 제작사업’ 희망사업단 유명종 대표

김혜령 기자 승인 2017.11.14 12:53 의견 0
이미 시작된 100세 시대. 은퇴가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노년의 삶이 청년의 삶과 같을 수는 없다. 자칫 위축될 수 있는 노년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다. 서울 관악구를 중심으로 어르신 자서전 제작사업을 하고 있는 희망사업단 유명종 대표를 만났다.

 

¶ 관악구에서 어르신들의 자서전을 만들고 계신다고 들었다.

 

☞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정식명칭은 ‘어르신 자서전 제작 사업’이다. 실은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책읽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유종필 관악구청장이 주요 공약으로 냈던 것으로 관악구가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관악구는 미취학 아이들이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북스타트’ 사업을 하는 한편 어르신들의 자서전을 지식자산으로 남기기 위해 ‘북 피니쉬’ 사업을 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자서전 집필 사업을 시도하고 있지만, 관악구에서 최초로 진행했으며 가장 꾸준하게 사업을 잘 해나가고 있다.

 

자서전은 유명인만 쓰는 것이 아니다

 

¶ 왜 어르신 자서전인가

 

☞ 통상적으로 자서전은 유명 인사들의 기록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다. 유명인 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서전을 남길 수 있다. 오히려 일반인들의 삶이 꼼꼼하게 기록되어지면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처음에 이 사업을 시작한 취지도 이런 기록이 생활사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관악구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삶을 기록해 나가다보니 관악구의 변화와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기록이 없다면 역사에서 몇 줄만으로 설명되는 겉핥기 정보만 남겨질 것이다. 노인의 삶은 단순 정보가 아니라 한 지역을 살아온 역사적 주인공들의 디테일한 기록이다. 이런 미시적 개인사들이 모여 한국 현대사가 완성된다고 본다.

 

어르신 자서전 사업을 하고 있는 희망사업단 유명종 대표 <p class=(사진 : 윤준식 기자)" width="468" height="550" /> 어르신 자서전 사업을 하고 있는 희망사업단 유명종 대표 (사진 : 윤준식 기자)

 

다음으로 가족들이 부모나 배우자의 삶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사람이 노년에 들어가면 뇌가 쇠퇴하며 지적 능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대화를 하려고 하다가도 자기 말만 하거나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결국은 주제가 모호해진다. 그래서 부모 자식 간에도 원활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자식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어르신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을 곳이 없다.

 

그런데 자녀들 입장에선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자신이 알고 지냈던 부모님 이외의 다른 모습, 이야기들은 흩어져 소멸되어 버린다. 자서전을 남기게 된다면 후일 부모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과 기억을 알 수 있게 되어 부모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큰 울림과 사랑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의 이야기는 어떤 유산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자서전은 유명인이나 쓴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소중한 것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르신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다. 자서전 쓰기를 통해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서전쓰기를 하다보면 과거의 에피소드가 자세하게 등장한다. 지금껏 자서전을 제작하는 과정 속에 순탄한 삶을 살아온 분은 한 분도 없었다.

 

평생을 굴곡있게 살아오신 어르신들은 자신의 시련, 실패, 또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자신을 상처 준 사람에 대한 분노를 평생 마음속에 쌓아두고 살아 왔다. 마음의 상처를 해소하지 못하고 담아두기만 하면 삶의 회복탄력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면 치유의 효과가 있다. 내가 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만 겪어왔던 경험들을 풀어내고 그리고 그 경험들 속에서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관악구청이 주관한 '어르신 자서전' 출판기념회장에 전시된 자서전 편찬자료들 <p class=(사진: 윤준식 기자)" width="550" height="412" /> 관악구청이 주관한 '어르신 자서전' 출판기념회장에 전시된 자서전 편찬자료들 (사진: 윤준식 기자)

 

기억의 파편을 모아 기록으로 재탄생시킨다

 

¶ 자서전 쓰기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녹음한 다음 녹취를 풀어내는 방식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사실 당시 고학력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글을 잘 못쓰신다. 뒤늦게 원고를 독촉해 받아도 어르신들에게는 이런 작업이 익숙치 않아 원고의 구성을 책으로 만들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간혹 이런 일을 소망하며 글을 써 놓으신 분들이 있는데, 이를 토대로 인터뷰로 내용을 보강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이런 경험을 종합해 3년 전부터는 관악구에서 자서전 집필 아카데미를 하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자서전 제작과 연계한 교육을 진행하는데 자서전을 쓰실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독려하는 한편, 자서전을 쓰기 위한 재료를 모으도록 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세대는 지금처럼 블로그나 SNS가 없었던 시대다. 간혹 일기를 쓰신 분도 있지만, 평소 기록을 해두지 않은 분이 대다수다. 그러다보니 기록보다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나 기억이 파편적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는 이를 연대기로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주관적 기억을 객관적 데이터로 나타내고 어렴풋한 기억을 공식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객관적 데이터로 정리를 위해 삶을 20년 단위로 끊어서 정리하도록 돕는다. 가족의 나이, 생년월일, 자식의 이름, 생일, 학교. 가족관계 증명 호적등본을 떼어 확인하게 한다. 이런 자서전 교육이 후에 자서전 집필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자서전 집필을 하는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차이를 보일 것 같다.

 

☞ 자서전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성장기까지의 이야기는 비슷한데, 결혼 이후의 역할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보통 50년대 이전 출생 어르신들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했었다. 그래서 남성들의 이야기는 바깥생활의 이야기가 많다. 직업의 변화, 결혼, 은퇴 이후의 삶으로 나뉜다. 여성들은 결혼 이후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삶, 자식 이야기, 시댁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자서전 쓰기 사업은 노인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p class=(사진 : 윤준식 기자)" width="550" height="540" /> "자서전 집필은 노인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진 : 윤준식 기자)

 

자서전을 통해 살아있는 현대사를 조명하다

¶ 특별히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면

 

☞ 지금까지 자서전을 제작한 분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분은 유선익씨다. 일을 의뢰하신 당시 92세이셨는데 자녀분들을 통해 자서전을 꼭 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오셨다. 자서전을 만드는 석 달의 기간 동안 조금씩 직접 원고지에 글을 써내어 주셨다. 2주에 1번 찾아뵈어 원고를 받고 자서전을 정리해 나갔다. 초고를 정리해 넘겨드린 후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병상에서도 책을 검토하시며 매우 좋아하셨다.

 

책이 나온 후에는 지인들을 모아 출판 기념회도 가졌고 초대해주셔서 그 자리에 참석해 함께 축하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평생의 숙원을 이룬 듯 너무 기뻐하셨다. 그런데 그 다음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에 찾아가 고인의 가족을 뵈었는데 따님 두 분이 자서전을 놓고 정말 좋아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책을 낸 것이 가족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지금껏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고 보람도 느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선엽 어르신. <p class=(사진은 출판을 기념한 식사자리에서 스마트폰에 담은 동영상을 캡쳐했다. 희망사업단 제공)" width="1280" height="720" />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선익. (사진은 출판을 기념한 식사자리에서 스마트폰에 담은 동영상을 캡쳐했다. 희망사업단 제공)

 

¶ (앞으로) 자서전 사업을 통해 이루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 자서전 제작사업을 보다 보편화시키고 싶다. 자서전 쓰기 사업을 통해서 어르신들의 고독한 시간을 해결할 수 있다. 자식이 많더라도 자식들이 지속적으로 어르신들과 시간을 함께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고독감과 소외감이 상당하다. 그러나 자서전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큰 활력이 생긴다. 고 유선엽 어르신 사례처럼 고령자들의 경우 내가 죽기 전 해야 할 일을 한다, 마쳤다는 성취감과 안도감을 얻으신다. 100세 시대가 시작되며하고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어르신은 앞으로 남은 노후의 삶을 새롭게 계획하는 계기로 삼으신다. 자서전 사업은 노인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서전 제작 사업을 보편화한 다음에는 개인사 박물관 형태로 개인들의 기록출판물들을 보전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 고인을 떠나보낸 후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게 되는데 모든 유품을 다 보관하기는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일부만 남기고 버리거나 태우는 게 보통이다. 집에 두면 단순 유품으로 취급되는 것들 중, 현대사의 기록물이 될 만한 것도 다수 존재한다. 이런 물건들을 사료 측면에서 보존하고, 개인의 유품을 보관하는 형태로 해 고인의 가족들이 찾아와 언제든지 유품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도 계획해 보고 싶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