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의 조각
마지막, 네 개의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았다. 어린 시절 성장한 가정의 분위기는 ‘디어 라이프’라고 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사업은 망했고 어머니는 건강을 잃어갔다. 소설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때를 불행한 시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집에 딱히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는 어머니가 호전되지 않고 더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디어 라이프> 중
이런 삶을 살아 본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성장한다. 인생을 비관하며 흐트러지는 삶을 살거나, 삶의 면역력이 충분히 생겨서 ‘회복탄성력(resilience)’이 강한 인생을 살아간다.
첫 작품 ‘시선’에서는 시신이 등장한다. 작가의 집안일을 해주던 여자의 죽음이다. 어머니는 장례식에 데려가 보기 싫은 시신을 보도록 한다. 작가는 한 번에 시신을 보지 못하고, 조금씩 끊어서 시신을 본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서 한참 동안 시신과 관련한 꿈을 꿨을 수도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최고 학년이라는 위세도 시신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큰 애정 관계가 없었던 할머니여서 눈물을 흘린 게 이상할 정도였다. 오히려 나보다 나이 많은 형은 거짓으로 우는 척했을 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적(敵)이 한 명 사라졌다는 기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시신을 마주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염하는 장면도 몇 번 보았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직접 차가운 시신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모두 낯선 경험이었고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다. 전체를 훑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겠지만, 시간의 상대성 원리를 고려하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절대 짧지 않다. 간혹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과거를 동경하는 사람들이다. 짧은 시선의 조각들이 전체 삶을 만든다. 그래서 전체를 관망하기가 어렵다. 파편들의 모음으로 전체를 구성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행복한 춤’을 추고, 삶을 친애하기까지는 분명 여러 단계를 거쳤다. 적어도 50년쯤-<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디어 라이프> 작품까지 걸린 시간–은 걸렸다.
◇왜 “디어 라이프”일까?
그 시기들은 내가 어머니를 정말 견딜 수 없어하고 아버지가 나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던 그 시기에 썼을 것이다. 혹은 당시 사람들이 유쾌하게 말하던 대로, 나를 흠씬 때려주던 그 시기에. <디어 라이프> 중
작가가 어렸을 때다.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니다. 어머니는 병이 있었고, 점점 가난해졌다.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로움을 느끼거나 집에서 탈출하려 한다. ‘가출’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어머니도 싫고, 아버지는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됐던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세상은 남자가 아닌 사람은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다. 암울함, 소외감이 일상을 가득 메웠던 시기다. 왜 이 시기를 ‘디어 라이프’라고 불렀을까? 반어법일까?
삶은 연속이다. 그러나 시기를 나눌 수 있는 연속이다. 좋지 않은 장면만 가져올 수도 있고, 좋은 장면만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게 섞여서 삶이 된다. 현재는 과거의 모든 시공간이 어우러져서 흘러와 존재하는 시공간이다. 작가는 과거의 우울한 시절을 버리지 않고, 당당히 가져왔다.
그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디어 라이프> 중
엄마에 대한 향수라고 생각하지 말자. 작가에게 어머니는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엄마에서 어머니로 변한 시기가 있다. 더 의지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작가도 ‘엄마’라고 불렀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머니’로 호칭이 바뀌었을 것이다.
죽음은 상황을 종료한다. 그렇다고 기억마저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삶 자체를 긍정할 뿐이다. 그 삶이 아픔으로 가득하고, 불평등하고, 폭력으로 인해서 불안하고, 가난해서 힘들었을지라도 작가는 그 삶들이 이어져 현재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삶에는“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야!”라는 희망, 즉 미래를 담보 잡아 현재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삶을 받아들일 뿐이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디어 라이프> 중
용서는 이해다. 그리고 이해는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쉰다. 그게 용서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디어 라이프”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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