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열린책들)
◇전쟁과 사랑
헤밍웨이의 롤 모델은 톨스토이였다. 그래서일까? 전쟁과 관련한 소설을 꽤 썼다. 실제로 참전 경험이 있기에 작가의 필체는 생동감이 넘친다(번역이 후졌다고 비판하는 독자도 있지만). 경험하지 않고 썼다면, 단순한 허구였겠지만 생생한 호흡이 있기에 작품은 리얼하다.
톨스토이와 비교하자면, <전쟁과 평화>라는 대작과 비교해야 할 작품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이후 ‘무기’), <누구를 위해서 종은 울리나?>(이후 ‘종’) 두 작품이 있다. 양으로 따지면 톨스토이의 작품이 훨씬 무게감 있으나 대중의 접근성을 고려하면 헤밍웨이 작품이 오히려 읽기 쉽다. 시간의 거리도 고려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작가의 표현도 어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죽음을 말한다. 앞서 다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온통 사(死)의 눈물바다를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극단적이지 않은 전쟁을 다룬다. 더 디테일하고 현실적인 장면을 다룬다. 가장 극적인 부분도 뭉클한 감정을 주지 못한다. 물론, 이 부분은 독자마다 다르리라.
왜 작가는 ‘무기’와 ‘종’에서 굳이 연애 스토리를 넣었을까? 심지어 두 작품 속 패턴도 거의 유사하다. 우연히 만난 남녀가 쉽게 사랑에 빠지고, 결말은 두 연인 중 한 명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나마 ‘무기’에서는 여주인공이 임신할 정도로 연애 기간이 길지만, ‘종’에서는 단 며칠 동안만이다. 그러나 애절함은 ‘종’이 더 크다.
그 차이는 절박함에서 왔다. ‘무기’는 탈영한 후 중립국 스위스로 넘어가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던 중에 벌어진 일들이고, ‘종’은 파르티잔(빨치산)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즉 죽음을 항상 목전에 둔 상황에서의 사랑이다.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하면 죽음 앞에서 느끼는 종족 보존에 대한 집착–성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극이 떠오르지 않는가?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전주곡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전쟁은 죽음이라는 말이다.
◇왜 전쟁일까?
“전쟁보다 나쁜 것은 없어요.” <무기여 잘 있거라> 중
이 한 마디로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 모두 표현된다. 가장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사건에 왠지 큰 목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질책한다.
“너무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 수도 없는 놈들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전쟁이 계속되는 거지.”
“게다가 그들은 전쟁으로부터 돈을 벌지.”
“대부분은 돈도 못 벌어.” 파시니가 말했다. “그들은 너무 어리석어. 얻는 것도 없으면서 전쟁을 하는 거야. 바보들.” <무기여 잘 있거라> 중
‘어리석은’ 위정자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바보’들이 하는 게 전쟁이라고 말한다. 전쟁을 희화화하기도 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완전히 가리진 못한다. 그래서 ‘무기’의 주인공은 전쟁과 스스로 화평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탈출한다.
‘종’에서는 전쟁을 더 맹목적인 사건으로 전락시킨다.
“그들은 전쟁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요. 왜 싸우는지 모르는 거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전쟁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상대방을 적(敵)으로 여기고 죽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전쟁이라 하여 살인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건 그래요. 그들이 알고 있는 거라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에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전쟁의 영웅은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살인 면죄부에서 살인 면허증이 발급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특수부대 대원들은 낙하산을 타고 하강하는 훈련을 꼭 해야 한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10회 이상)을 점프하면 상징적인 의미로 전투복에 낙하산 기장을 하나 달 수 있도록 해준다. 이들에게 주어진 하강 마크는 결국 인간을 죽이는 연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일까? 이념이나 종교일까? 작가는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순수성은 사라진다. 그저 죽이기 위한 전쟁이 된다.
“그렇지만 곧 싸움을 하는 과정에 그 순수한 감정이 변질되었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 그 싸움을 잘하는 자들은 순수한 감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첫 여섯 달이 지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체념에서 악(惡)으로
기본적으로 작가는 전쟁을 싫어한다.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는데 인간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무기’와 ‘종’에서 차이가 있다.
작가는 ‘무기’에서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고 생각하면서 체념한다. 단지, 그 시간의 빠르고 느림만 있다고 말하면서 염세주의인 것처럼 넋두리한다.
세상은 그를 죽인다. 아주 착한 사람, 아주 점잖은 사람, 아주 용감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인다. 설사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언젠가 그를 죽인다. 단지 그리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 중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의 생각을 빌려 작가는 본인의 말을 전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죽는다고.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 가지. 결코, 그 의미를 깨우칠 시간의 여유도 없이.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다음 세상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통지받는 거야. 그리고 그 규칙의 베이스에서 떨어지자마자 세상은 그 사람을 죽여 버리지. 아니면 아이모처럼 어이없게 죽여 버리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해서 천천히 죽이지. 결국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건 확실해. 잠시 유예해 줄 뿐 결국에는 죽여 버리지. <무기여 잘 있거라> 중
‘무기’에서 볼 수 있는 전쟁과 죽음은 시간 차이일 뿐이다. 어차피 죽는 인생에 대한 체념이다. 그러나 ‘종’은 다르다.
전쟁을 이유 없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그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같은 종족의 생명을 끊어버린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그럴 권리가 자신에게 없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 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모른다. 네가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렇지만 나는 죽이지 않으면 안 돼. 네가 죽인 사람 중에 진짜 파시스트는 과연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그리고 소설이 흘러갈수록 조금 더 큰 소리로 전쟁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비판한다.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죄악이야.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살인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무기’에서의 죽음에 대한 운명론이 ‘종’에서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전쟁을 비판한다. 운명론에서 벗어나니, 이제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을 ‘악’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전쟁 영화를 즐겨본다(개인적으로는 전쟁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참혹함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잔인한 전쟁의 본 모습–잔인한 장면-을 잘 묘사한 영화일수록 대중들에게 만족감을 준다. 전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감정은 그런 장면에 흥분하는 것이다. 아무리 잔인해도 영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희미해진 전쟁: 6·25전쟁
2020년은 6·25전쟁 70주년이다. 당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3년 동안 2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인데, 이제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민족상잔’, ‘멸공’, ‘반공’, ‘통일 안보’ 등 다양한 언어들을 파생시킨 6·25전쟁이지만, 곧 기념식 외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나쁘다. 그래서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면, 언제라도 새로운 지옥문이 다시 열릴 수 있다. 지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지옥은 흥미 진지한 롤러코스터로 착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서워도 자신의 생명에 해를 끼치지 못하는 놀이기구로 전쟁을 착각하는 순간, 전쟁은 하나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본인의 심장에 탄이 박혀야만, ‘아, 죽는구나!’라는 현실을 죽어가는 육체의 영혼만이 알아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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