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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21)]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계속 된다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행복한 그림자의 춤> ②편 - 엘리스 먼로 (2013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9.09 00:59 의견 0

◇“행복한 그림자”

전편에서는 ‘그림자’에 대해 다뤘다. 이번에는 작가가 추가한 수식어 ‘행복한’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림자는 행복할 수 없다. 물론, “그림자 자체를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복조차도 그림자 행복일 뿐이다. 즉, 진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화 <매트릭스>와 같다면, 가짜 행복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매트릭스가 아닌 실제 세상에서는 여전히 진실이 중요하다.

작가는 그림자 행복의 허위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자여서’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를 인식하고 지적한다.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서의 행복은 그림자 행복임을 고발했다. 남성과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처지를 한탄한 것이다.

◇춤의 본질

플로에서 춤추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 그들이 플로에 나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남자아이가 춤을 신청해야만 한다. 만약, 그런 과정이 없다면? 그 여자아이는 춤을 출 수 없다. 그리고 춤을 추지 못하면 예쁘게 입고 온 드레스나 그날만을 위해서 준비한 모든 치장과 정성은 남들이 볼 때도 무안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트너의 사전 데이트 신청을 간절히 바라는 처지에 놓인 여자아이들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의 데이트 신청은 거절할 수 있다. 단, 다른 남자가 대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부담감은 감수해야 한다.

‘춤’을 추는 대부분 여자아이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춤을 춘다. 선택받았다는 자부심과 안도감이 그녀를 웃게 한다. 그러나 그런 춤은 스스로의 것이 아니기에 행복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한 춤’이 아니라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다.

나는 집을 돌아 뒷문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댄스파티에 갔다 왔고 한 남자애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입맞춤을 했다는 것.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내 인생도 가능성이 있었다. 주방 창문을 지나치다가 엄마를 보았다. 열어둔 오븐 문에 두 발을 대고 앉아서 받침도 없는 컵에다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돌아와서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할 마음이 없었다, 전혀. 하지만 보풀이 일고 빛바랜 페이즐리 무늬의 실내복을 입고 애써 졸음을 참으며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주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를 보는 순간, 내게 이상야릇하고 지긋지긋한 의무가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깨닫는다. 하마터면 그 행복을 놓칠 뻔했다는 것도, 언제고 엄마가 알려고 하지 않는 때가 되면 쉽사리 놓치리라는 것도.  <붉은 드레스–1946> 중

단 한 번의 댄스파티로 소녀는 “인생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을 엄마에게 말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이상야릇하고 지긋지긋한 의무”이자 “행복”이라고 느낀다. 먼로의 단편에 나오는 여자들은 혼자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보자. ‘남자여서’를 생각해 보자

여성만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남성만의 시선과 관점도 인정받아야 한다. 플로에서 춤추기 위해서 남자아이도 여자아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는 춤출 수 없다. 춤을 신청하는 손을 내미는 결정은 남자의 몫이다. 하지만, 수락의 열쇠는 여자가 가졌다. 남자는 춤추기까지 용기를 내야 한다. 만약에 있을 거절의 부끄러움과 무안함과 패배감을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춤을 출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소녀가 있더라도 경쟁이 심하다면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도 남자는 능동적으로 보이고, 여자는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겪는 남녀가 다를까? 신청 받지 못한 수치심과 거절당한 무안함 중 뭐가 더하고 덜할까? ‘여자여서’ 할 수 없는 게 있는 현실은 ‘남자여서’ 해야 할 게 있는 세상이다.

그래도 “권력은 남성에게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영역을 조금만 제한하자.

플로라는 현실에서 남자와 여자는 별로 다를 게 없다. 결은 다를 수 있지만, 부담과 수치를 느끼는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는 줄어든다. ‘여자여서’가 있듯이 ‘남자여서’가 존재한다.

◇간절한 소설 바람(desire)

소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먼로의 시선은 꽤 날카롭고 압축적이다. 그러나 ‘행복한 그림자 춤’이 ‘행복한 춤’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여서’라는 탄식만 쏟아 놓고 있다. 문제 인식은 정확했지만,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지 않았다. 물론, 제대로 된 문제 인식이 우선이다. 그래야 해답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작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라고 마살레스 선생님이 대답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이가 없도록 당스 데 옹브레 외뢰즈(Danse des ombres heureuses)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붉은 벽돌집이 늘어선 무더운 거리를 빠져나오고 시내를 벗어나 마살레스 선생님과, 이제 두 번 다시 못할, 앞으로 영영 못할 게 거의 확실한 선생님의 파티를 뒤로 하고 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그림자 춤> 중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이 <행복한 그림자 춤>이다. 소설은 답답하다.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거절도 못 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마지막일지 아닐지 알 수 없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그림자 춤’은 ‘행복한 춤’이 아니기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림자로 살아서는 안 되기에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자유, 평등을 애타게 찾는 이유가 바로 ‘행복한 춤’을 위해서다.

“왜 안 되는데요?” 메이가 물고 늘어졌다.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니와 헤더 수가 문가에서 지켜보았다.
“왜요? 할머니, 왜 안 되냐고요.”
“이유는 네가 알잖아.” 
“뭔데요?”
“거긴 온갖 사내아이들이 다 가는 곳이니까. 전에도 말했잖니. 말만 한 계집애가 어딜 간다는 게야?” <어떤 바닷가 여행> 중

지금도 생존하신다면 100세를 바라보셨을 외할머니께서 종종 이런 유의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감히 하는 사람도 없고, 듣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게 아니며, 듣지 않는 것도 아니다. 눈으로 훑어보는 사람의 시선과 그 시선을 기분 나쁘게 여기는 여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플로에서의 춤은 남녀가 함께 있어야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행복한 그림자 춤’을 추려고 기다리는 여자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 머뭇거리는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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