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43gDGFuX30
◇선과 악을 나눌 수 있을까?
“죄악이란 멋지고 세련된 거예요.” 캐서린은 말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 중
아군은 선(善)이고 적군은 악(惡)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를 항상 선(good)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무기’에서는 결과론적으로 연합군이 선이어야 하고 ‘종’에서는 파시스트가 선이어야 한다. 그러나 파시스트를 선으로 인정하자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비단, 우리나라의 6·25전쟁 역시 그렇다. 어느 쪽에 서는가에 따라서 선악이 달라진다.
전쟁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오직 악뿐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 이유는 다르다. 신념의 차이, 사는 곳의 차이, 인종의 차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어제까지 인사 나누며 같이 밥 먹었던 사람을 오늘 죽이기도 한다.
누가 선이고 악일까? ‘무기’는 전쟁을 조소하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전쟁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나 속 깊은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는다. 당시 작가의 한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에서는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전쟁의 부당함을 전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정당함이 있을까? 과거 영화 <공공의 적>에서 조규환(이성재 분)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가 있냐?” 평상시 살인은 중죄이며 엄벌로 다스린다. 그러나 전쟁통에 살인은 정당하며, 오히려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경우 영웅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는다.
‘종’에서는 파르티잔(партизан)의 리더였던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현재 속에서 비겁자일 뿐이다. 공화국을 위해 파시스트를 몰살시키는 공을 세웠지만, 이후 그런 살인행위를 스스로 정당화하지 못한다. 오히려 살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초기에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죠. 파블로는 페스트보다도 더 많이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그는 전쟁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전쟁은 달아나는 그를 다시 끌고 온다.
선과 악이 구분돼 선이 악을 이긴다면,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면, 고뇌가 생긴다. 특히, 누군가를 죽였던 인간은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이 아닌 이상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괴로운 식은땀을 헤밍웨이의 등장인물들도 함께 흘리고 있다. 다만, 전쟁이란 상황이 고뇌의 시간을 계속할 수 없게 할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KB-Suz_2DQ
◇주인공의 죽음: 작가 죽음의 복선인가?
작가는 ‘무기’에서는 여주인공을 죽이고, ‘종’에서는 남주인공을 죽인다. 복선이 깔려있지만, 주인공들의 죽음은 당혹스럽다. ‘무기’에서는 살아남은 남주인공의 회한 섞인 깨달음, ‘종’에서는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 적(敵)을 향해 최후의 사격을 시도하는 치열함이 다를 뿐, 둘 다 비극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모두 종식됐다. 전쟁이 종식되면, 평화가 올까? 그렇지 않다.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인생은 죽는 날까지 전쟁임을 설명해 주려 했을까? 작가 역시 인생의 치열한 흔적이 있으니, 두 전쟁은 작가의 인생이기도 하다. 오히려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다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작가 죽음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차이는 곧 다름이다
우리나라의 6월은 6·25전쟁이 표시된 달이다. 1950년에 발발해서 1953년 정전(Armistice)으로 중단됐다. 정전이기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최근에도 북한은 도발했고, 불안한 남북관계가 이어진다.
전쟁은 3년 동안 25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았다. 물론, 참전한 외국 군인도 있으나 대부분 같은 민족이다. 국민 대부분이 한민족 자부심이 있는데, 민족상잔의 비극은 그 자부심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다. 여전히 민족을 운운하면서 남북이 만나고 평화 우호증진을 위해서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남과 북이 생각하는 평화의 개념이 다르고 그 실천 방법도 다르다.
전쟁은 인간 탐욕의 결정판이다. 뭔가를 더 얻기 위한 인간의 욕심이 기본 추진동력이다. 그런데, 이런 욕심을 정당화해주는 변명이 차이이다. 인종차별과 관련한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미국에서의 사건도 인종차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말살을 시도했던 나치의 악마 같은 시도도 차이라는 명분이 그런 악랄함에 면죄부를 부여했다.
차이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충분조건이다. 다르기에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제일 먼저 쏴 죽였어요. 아버지는 사회당에 투표했거든요. 이어서 어머니를 죽였어요. 어머니도 사회당에 투표했거든요. 투표라고는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그런 다음 그들은 매형을 쏴 죽였어요. 매형은 시내 전차 운전사 노동조합의 회원이었어요. 그 조합에 들지 않고서는 운전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뚜렷한 정치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중략) 다른 매형은 나처럼 산으로 들어와 파르티잔이 되었어요. 그자들은 누이가 매형의 은신처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래서 매형이 있는 곳을 대지 않는다고 하면서 누이를 쏘아 죽였어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그런 차이는 누가 만들었을까? 선악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해준 것일까? 과거에는 신의 이름이 기준이었다. 이후에는 이념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최근에는 ‘자본’이 대신한다.
누군가는 도덕이 상실된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부터 도덕은 이름뿐이지 실질적인 행동지침은 탐욕이었다. 그 마음을 가리기 위해서 ‘신’, ‘이념’ 등으로 덮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다. ‘물신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돈’은 신이고 이념이니 말이다.
작가는 전쟁의 허망함을 기록했다.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작가가 되묻는다. ‘사람을 죽이고 얻는 게 뭐지?’라는 질문에 작가는 직설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을 읽는 독자가 그 답을 각자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해결방법은 없다. 현실을 인식하고 전쟁을 부정하지만, 앞으로의 방향은 설정하지 못한다. 그게 문학의 한계일 수도 있다. 질문을 무수히 던지지만, 해답은 없는. 그래서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겨주는. 마치 호수에 돌멩이로 물수제비하고 난 후의 사라지는 원(員)과 같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보편적 인류를 위한 전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직 소수의 권력 무뢰배를 위한 전쟁만 있었다. 그 소수에게 충성해서 그 부류로 들어가려 한 인간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참사가 바로 전쟁이다.
6·25전쟁 70주년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누구를 위한 통일일까? 현세대는 전쟁도 통일도 바라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과 북한의 증오로 평생을 버틴 사람들 대부분이 땅으로 돌아간 지금, 현대인은 전쟁의 공포는 잘 모르고, 통일의 간절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서 민족을 내세우고 이념을 팔아먹는다.
그래서 작가는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 그리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종은 울리는 건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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