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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20)] “여자여서”, “남자여서?”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행복한 그림자의 춤> ①편 - 엘리스 먼로 (2013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8.28 11:51 의견 0

◇단편의 어려움

먼로의 단편은 어렵다. 독자가 남성이라면 그녀의 소설을 더 소설처럼 읽을 수도 있다. 여성의 언어를 남성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더 오랜 시간 작품에 몰입해야 한다.

장편은 한 장면을 놓쳐도 다른 부분에서 채울 수 있다. 전체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단편은 다르다. 육상으로 따지면, 단거리와 같다. 총성과 함께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해서 스타트부터 피니시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페이스 조절은 사치다. 호흡조차 하지 않고 끝까지 달린다. 단편 소설은 처음부터 몰입하지 않으면, 줄거리조차 파악하기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몰입했을 때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다. 처음에는 “벌써?”라는 허탈감을 경험한다. 종종 작가의 의도를 찾기 힘들 때도 있다. “도대체 난 무엇을 읽었지?”라고 되물을 때도 있다. 누구 하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 답은 독자가 찾아야 한다.

해설서도 작품을 어설프게 엮었을망정 만족스러운 해제가 아니다. 한 편, 또 한 편을 읽고 전체적인 고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고리를 찾아 연결할 이유는 없다.

좋은 점은 한 권의 책에 다양한 작품이 포장돼 있어서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단편 하나가 재미없다고 하더라도 다음 작품은 흥미가 있을 수 있다.

먼로의 소설은 굉장히 압축적이다.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를 한 번 읽고 캐치하는 게 쉽지 않았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속에서 그녀의 언어를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앨리스 먼로  (출처: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 Photo: J. Munro)

◇그림자가 뭘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생각해 보자. 캄캄한 동굴에서 앞 사람의 뒤통수와 그림자만 볼 수 있다. 그것밖에 볼 수 없어서 보이는 게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우연히 바깥세상을 구경했던 사람은 동굴의 오류를 알지만, 그동안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진리를 알리려고 다시 돌아간 동굴에서는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작가는 플라톤의 동굴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말은 자기만의 정체(正體)가 없다는 뜻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여성은 그림자로 은유 된다. 그러나 그 시대만(작품이 1968년에 출간됐다)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생동감이 넘친다.

◇그림자의 저항 “미투 운동(Me Too Movement)”

작가는 모든 작품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남성은 철저히 여성의 보조적인 역할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등장인물이 묘사되고 사건이 전개된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그녀들은 좌절했고, 분노했고, 체념했다.

‘미투’가 한창이다. 굵직한 인물들이 그야말로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물론, 악의적인 공세로 생각될 때도 있다. “왜 과거 일을 이제야?”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실은 사실 아닌가? 악의적인 음모라 하더라도 어쨌든 없었던 일을 꾸며서 고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서 약자는 음모에 가까운 저항을 할 수밖에 없다. 음모와 계략으로 취급해도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피해자의 충격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미투’는 그림자로 살았던 여성들의 반란 혹은 저항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웃기지 마!”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의견도 존중한다. 예외는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리고 운동의 목적이 평등이 아닌 권리만을 위한 투쟁이라면 ‘미투 운동’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예스24 제공)

◇“여자여서”

작품은 ‘여자’를 다룬다. 정확하게는 다양한 여성을 다룬다. 임대인이 작가를 꿈꾸는 여성한테 추근대는 <작업실>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작업실> 중

안과 밖이 구분돼 있다.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주부는 여성에게 어울린다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주부가 글을 쓰러 작업실을 구한다. 남편의 동의를 얻어서 자신만의 공간을 어렵게 구한다.

“남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여자분들은 아무래도 아늑한 것을 더 좋아하니까요.” <작업실> 중

편견으로 가득한 임대인이 세입자 여성에게 배려를 빙자해서 추근댄다. 아내가 있음에도 그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미 그의 아내도 그런 남편을 포기한 상태다.

“당신 태도가 여간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소. 문을 걸어 잠그고서 노크를 해도 못 들은 체하다니, 그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오. 뭔가 숨길 게 있다면야 모를까. 남편과 자식들까지 있다는 젊은 아녀자가 타닥타닥 타자기나 두드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모를 속이지.” <작업실> 중

결국, 여자는 어렵게 구한 작업실을 떠난다.

다음은 젊은 청춘의 하룻밤이다. <태워줘서 고마워>는 그야말로 즉흥적인 젊은 남녀의 만남을 소재로 한다. 그리고 항상 상처받는 쪽은 여자였음을 보여준다.

“우습지 않니? 너도 알겠지만 여자애들은 너나없이 겨우내 지난여름 타령이고 그때 그 남자들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는 게. 남자들은 보나 마나 여자애들 이름조차 까맣게 잊었을 텐데 말이지…….” <태워줘서 고마워> 중

최근에는 상황이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직도 헤어지고 나면, 여성이 더 많은 제약을 받는다. 대체로 같은 곳에서 일한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지면, 떠나는 쪽은 여성이 더 많다.

나는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조지는 잠을 자려고 뒷좌석에 누웠다. 그때 우리를 쫓아오며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 지독히 노골적인 독설 같은, 버림받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워줘서 고마워!” <태워줘서 고마워> 중

다음은 소녀와 소년 이야기를 보자.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는 소녀가 소년이 되지 못하고 서서히 동생(소년)에게 밀려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예전에는 계집애라는 말이 아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 같았다. 계집애는, 내가 지금껏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냥 본디부터 타고난 내가 아니라 어떠어떠하게 되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계집아이를 규정하는 말은 언제나 강다짐과 꾸지람과 실망의 뜻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중

고정관념은 깨지 못한다. 남동생보다 더 씩씩하고 강하다고 여겼던 어린 시절이 지나고 나니 육체적인 힘으로도 동생보다 못하고 집에서도 감히 바깥일을 돕겠다고 나서지 못한다.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소녀는 넘어설 수 없다.

아버지는 체념한 듯 심지어 유쾌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용서하되 영원히 내치겠다는 듯한, 그 말을 했다. “계집애일 뿐이니까” 나는 그 말에 반발하지 못했다, 마음속에서조차.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르니까.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중

소녀는 스스로 인정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르니까”라는 작은 목소리는 체념을 상징한다.

모두‘여자여서’ 겪는 일들이다. 세상에는 분명히 남녀가 함께 존재하지만, 그 형태가 다르다. 남자는 실체로 존재하고 여자는 그림자로 따라다닌다.

독자(필자)가 남자임에도 먼로의 작품은 불쾌하게 읽히지 않는다.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언어에 항변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 사회도 ‘여자여서’라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정리하면 “‘남자여서’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짓누르는 사회는 아니냐?”라고 하면서 비판할 수도 있다.

남녀는 구별된다.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굳이 신체적인 영역이나 뇌의 구조까지 똑같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영역을 따로 나눌 필요가 있을까? ‘남자여서’, ‘여자여서’로 나눈 영역 표시는 결국, 동등한 인간의 자유를 훼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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