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이마는 정상이었습니다. 열이 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생한 우리 딸들, 그리고 저. 어머니께서도 기력을 어느 정도 차리셔서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가는 손녀딸들의 머리를 만져주셨습니다.
아이들의 컨디션은 정말 좋았습니다. 다만, 오랜만에 활동하는 것이니 적응 기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코로나와 전쟁 중이셨지만, 그 전쟁도 곧 끝이 날 예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한 아내도 여러 모로 힘든 상황이었고요.
“차라리 나도 들어가서 걸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밖에서 생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좋은 숙소에서 지내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사무실에서 지내다가 샤워를 꼭 해야 할 때만 숙소를 이용하는 수준이었으니 그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두 딸이 건강을 회복해서 일상생활을 다시 시작한다고 하니, 엄마의 마음도 한결 나아진 듯했습니다. ‘자식이 뭔지….’
“조금만 버팁시다. 곧 어머니께서도 격리 해제되면 여보가 들어 올 수 있을 테니.”
아이들이 다시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가던 날 어린이집 선생님이 확진돼 격리에 들어갔고, 학교에서도 여러 아이가 확진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 1천 만 명 시대니 이제 누가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아예 학기 초에 걸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안 걸리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죠.
수도권에 사는 동생이 냉동 설렁탕을 보냈는데, 마침 새벽에 도착해 뜨겁게 끓여 아침으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입맛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의 애로사항을 듣는 것도 참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틀만 더 버티면 되니까,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어머니의 코로나도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물러날 참이었습니다. 정말 시간이 해결해 주는 듯했습니다. 물론,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지금은 시간이 지나야만 정상생활이 가능할 듯했습니다.
오후가 돼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니, 분주해집니다. 설거지할 것도 늘어났고요. 할머니와 최대한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 시켰습니다. 일단, 면역력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접촉을 최소화 하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요. 재감염 자도 속속 등장하고 있었으니 아빠 마음에는 최대한 조심시키고 싶었습니다.
두 아이의 회복 후 첫 날은 아주 평온하고 활달했습니다. 싸우고 울고, 웃고, 떠들고. 간만에 주아를 안아주기도 했고요. 정말 오랜만에 막내를 안아 보니, 뭉클했습니다. 저도 역시 부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씻기고 잠자리를 봐줬습니다. 아직 할머니와 같이 자게 할 수는 없어서 자매가 엄마아빠 방에서 잘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어머니께 인사하고 저 역시 저만의 격리 된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특별히 할 일 없었습니다.
거의 10일 동안 제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능률도 오르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 건강만 잘 챙겨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코로나 확진 자의 격리는 그들만의 격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격리 시켰으니까요.
그리고 격리에서 해제됐다고 해서 바로 다시 전처럼 합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적응 기간이 필요했으니까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른들은 일터에서, 가족은 감정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제3자의 눈으로는 그저 일주일 격리였지만, 실제로 격리 된 가족의 상황은 일주일을 넘겨야 했습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의미죠.
그래서 ‘코로나 격리 해제’가 아니라 ‘코로나로부터 회복’이라고 해야 합니다. 한 번에 모든 게 원위치 되는 게 아니라, 서서히 이뤄지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우리 가족 코로나 시기는 조금씩조금씩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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