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작품을 처음 접한 때는 대학시절이었다. 단편 『변신』을 시작으로 『성』, 『실종자』, 『소송』 외에도 여러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마흔이 넘도록 다시 찾지 않았다. 한 번 읽고 말 작품들이 절대 아니었지만, ‘또 읽어?’라는 생각만 해도 꽤나 곤욕스러움을 떠올려야 했기에 쉽게 책을 손에 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머릿속에는 ‘한 번 다시 읽어봐야지!’라는 아쉬움을 되뇌면서 살았는데, 20여 년이 지난 후 실행으로 옮기게 됐다.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는 굉장히 버벅거리며 읽었다면, 마흔 중반이 넘은 나이에 읽은 『성』은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20년이 넘은 세월을 헛되이 버린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멋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본다.
카프카의 작품은 대체로 미완성이다. 그러니 작품을 읽고 난 후 독자가 상상력을 동원해야할 수고가 다른 작품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카프카가 일찍 삶을 마감했고, 건강하게 생존하지 않았기에 작품은 밝고 경쾌한 느낌이 아니다. 게슴츠레한 날씨가 연상되는 분위기,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등장인물과 연결고리가 명확하지 않은 줄거리. 읽고 나서도 답답함이 남는다. 중도에 포기한 사람은 다시 읽어도 또 포기할 수밖에 없는 미로와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작가의 삶을 훑어보고 작품과 연계하면 조금씩 탈출구가 보인다. 카프카는 188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현재 체코의 수도)에서 태어났다. 출신은 유대인이었고, 언어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1924년에 생을 마감했으니, 채 40년을 살지 못했다. 그것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산 것이 아니라, 지병을 앓고 살았으며 평생 주변인으로밖에 살지 못했다.
출신, 신체적 조건 등이 모두 좋지 않았던 작가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그의 작품 자체가 작가의 삶을 대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우울한 분위기, 절대로 익숙할 수 없는 작품의 분위기, 그래서 독자도 늘 머뭇거리다가 중간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작품 속 K가 들어가지 못했던 ‘성’과 같은 느낌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다.
K가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통치하는 지역에 등장했다. 그는 측량사로 일하러 왔는데, 성에서는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 그를 고용한 정보가 불확실하다. 어쨌든 정착을 각오한 K는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성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여러 주민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가운데 ‘프리다’라는 여인과 결혼을 약속하고 정착을 약속하나,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해로 파혼하고 만다. 마을 주민도 그에게 우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편과 그렇지 않은 편으로 나눠지는 데, 공통적인 부분은 K가 성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비웃거나, 만류한다.
아울러 그곳에 대해 자세히 파헤치려는 시도도 무용하다고 하면서 우려를 표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면장 이상의 공무원과는 만날 수 없고, 성에서 힘이 있다는 ‘클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가 만날 수 있는 수준은 그 보다 아랫사람인 성의 하수인 수준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만 K는 어떤 답도 찾지 못한다. 카프카가 결말을 썼다고 하더라도 K는 성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카프카의 전작의 주인공들처럼 비극적으로 마무리 됐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경계 밖의 사람으로 구분 된 K
작가는 K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을 표기한다. 이름으로 불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주인공 K만 이름이 없다. 성 내외에서 기존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는 모두 이름이 주어지지만, 새롭게 등장한 K에게는 이름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민들은 K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주지도 않고, 낯선 이방인 취급을 할 뿐이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K는 “고향 집을 떠나오기 위해 치른 희생, 그 길고 힘겨웠던 여행, 여기에 채용된다고 해서 가졌던 근거 있는 희망, 의지가지없는 이 무일푼 신세, 이제 다시 고향에 돌아가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처지,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이곳 여자인 나의 신부, 이런 것들입니다” 등의 이유를 들어 모욕과 외면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에 머무르려고 한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910년 대 이후라고 생각하면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한 없이 벗겨 먹었던 파렴치한 시공간이었다. 그리고 강대국의 ‘표준’이 전 세계에 강요됐던 시기였다. 이후 칼 슈미트와 같은 법학자는 ‘노모스’라는 개념으로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를 설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K는 경계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자, 강자에게 착취당해야만 했던 약자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기존 무리에 속하고 싶어도 끼어주지 않아서 항상 외롭게 남을 수밖에 없었고, 차별 당함을 당연하게 여겨야만 했던 유대인이었던 작가의 처지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지하다 시피, 이후 유대인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핍박을 받는다. 그저 유대인이어서 차별 받고, 이유 없는 폭력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경계 밖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피라미드 식 관료주의 사회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개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관료주의다. 처리가 빠르지 않은 공무, 실수가 있어도 인정하지 않는 공무, 정작 만나고 싶은 높은 사람 근처도 갈 수 없는 민간인, 알아서 피라미드 조직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백성. K는 마을에 도착해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런 자유도 정작 성 밖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결론적으로 어디서도 거주할 곳 없었던 그에게 자유는 철저히 기존 주민들의 외면을 토대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가 원한 자유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택했던 방랑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자유, 이 기다림, 이 불가침성보다 더 무의미하고 더 절망적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성은 관료주의의 결정판을 의미한다. 꼭대기 근처조차도 도달할 수 없는 일반인들의 삶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민원을 아무리 제기해도 정해진 범위를 넘어서면 어떤 응답도 들을 수 없는 현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수준의 공무원도 말단 공무원 아닌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말단 공무원들이 관료주의의 전부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인물들은 종종 바뀐다.
그러나 그 꼭대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관료일수록 바뀔 가능성이 없다. 현대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리더는 바뀌더라도 그들을 지탱해주는 관료 체제가 통째로 바뀌는 일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고착화돼 변화 가능성이 부족한 시스템에 대해서 ‘막스 베버’는 ‘아이언 케이지(Iron cage)’라고 하면서 비판했다.
이런 의미에서 K는 현재 현대인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잠시, TV 등을 통해서 자주 보이는 고위 공직자, 재벌 총수 등을 떠올려 보자. 매일 대통령과 관련한 메시지를 듣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는 숫자가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보다 많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점에서 ‘성’은 현재 ‘용와대’이기도 하고, 작품의 분위기는 현대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복, 그리고 또 다른 성곽
1945년 해방됐다. 그리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심, 곧 독재의 시절을 맞이한다. 오랜 독재를 겪다가 1960년 4·19로 어렵게 민주화를 이룩하는 듯했으나, 체계적인 관료주의를 앞세운 군부에게 18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넘겨줬다. 그리고 10·26으로 독재자가 운명하고 이제는 진짜 새로운 세상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곧 이어 등장한 신군부. 그들은 다시 7년이라는 시간을 어둠으로 연장했다.
이윽고 등장한 6·29. 이제야 말로 세상이 바뀔 거로 기대했으나, 민간복으로 갈아입은 군인이 5년을 더 통치한다. 이후 문민정부가 등장하지만, 이제 추구하는 목표는 오직 권력뿐이었다. 이후 정권교체가 있었고, 또 다시 정권교체, 그리고 또 정권교체, 그리고 이번에는 이쪽에 있었던 사람이 살기 위해 다른 쪽으로 옮겨가 정권을 쟁취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정권이 교체됐을 때 우리는 정말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존의 성은 오히려 견고해졌고, 그에 못지않은 성 하나가 더 만들어졌을 뿐이다. 전복될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던 국민은 이제 새로운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더 나쁘지 않은 것을 택하려고 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바람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여전히 대중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혹은 그렇게 만들어 진 인물들의 설화에 가스라이팅 돼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만든 적(敵)을 내 적(敵)인냥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지만 ‘모든 국민, 모든 유권자가 현명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진실인 듯하다.
K가 도착했을 때, 모든 주민은 그를 외인 취급하면서 성의 규칙과 질서를 강조했다. 그 규칙의 정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오로지 성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기에 따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규칙에 저항하던 K 역시 중과부적으로 그 질서에 조금씩 따르려 한다. 현대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과 다른 점을 찾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성의 주민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가끔 그런 수동성에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대중은 그를 K 쳐다보듯이 할 것이다. 그런 대중의 시선을 극복하고 신념을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는 슈퍼 K는 존재할까? 혹은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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