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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고현학]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의 고현학

방랑식객 진지한 승인 2024.08.02 19:17 | 최종 수정 2024.08.12 14:05 의견 0

고현학(考現學)이란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참된 모습을 규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고현학]은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사안 하나를 주제로,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펼쳐보는 이색코너입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를 중심으로 정리한 넓고 얇은 내용이지만, 일상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의 층위를 높여가 보자구요!

연일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어 잠 못 드는 밤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의 명승부가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영국 런던에 이어 근대올림픽을 3번이나 개최한 도시이기도 한데요. 파리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때가 1900년과 1924년으로 이번 올림픽은 무려 100년만의 개최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1. 1900년 올림픽이 파리에서 개최된 이유

1900년 파리 올림픽은 근대올림픽 역사상 2번째 올림픽인데요. 왜 2번째 올림픽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는지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선 고대 올림픽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중단되었는지부터 말씀드려 볼게요.

고대 올림픽의 기원은 기원전 776년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통합된 단일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가 있었죠. 4년마다 각 도시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함께 경기를 치르면서 서로의 기량을 뽐냈습니다.

당시의 올림픽은 제사와 경기가 합쳐진 일종의 축제 형태였는데요. 그중에서도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올림피아 신전에서 열린 제전이 가장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올림피아 제전이 시작되면 서로 전쟁을 벌이던 도시국가들도 휴전을 선언하고 올림피아 신전으로 모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올림피아 제전이 바로 올림픽의 기원입니다. 올림픽을 ‘평화의 제전’이라 부르게 된 이유도 바로 그거죠.

2. 로마에 의해 중단된 평화의 제전

그런데 고대올림픽은 로마 제국에 의해 사라지게 됩니다. 서기 393년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며 국교화했고, 이교도를 몰아낸다며 그리스 신전에서 개최되던 올림픽을 금지키고 맙니다. 고대올림픽 천 년 역사가 이렇게 끊어지고 만 거죠.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잊히는 듯하다가 1500년 지난 19세기 말 프랑스의 쿠베르탱에 의해 부활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쿠베르탱을 근대올림픽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요. 고대올림픽의 상징성 때문에 1896년 제1회 대회를 그리스 아테네에서 치렀습니다. 그리스는 올림픽을 자기 나라에서 개최하고 싶었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여러 나라를 돌아가며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2회 대회를 쿠베르탱의 나라인 프랑스 파리에서 치르게 된 거죠.

3. 쿠베르탱은 어떤 인물인가?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Pierre de Coubertin, 1863-1937)은 프랑스의 교육자이자 역사가입니다. 1863년에 태어났지만 실제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남작’이라는 칭호가 붙는데요... 많은 분들이 프랑스대혁명이 18세기말에 이루어졌기에 이후로는 프랑스에서 귀족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시지만, 프랑스대혁명 이후 오랜 혼란기를 겪으며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체제가 계속 바뀌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등장하며 황제가 되었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마지막 혁명이나 다름없는 파리코뮌이 1871년에 일어난 정도이니, 19세기까지 귀족 계급이 시민 세력과 함께 공존했던 거죠.

쿠베르탱은 청년기부터 강력한 프랑스를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군인으로서는 적성이 맞지 않아 사관학교를 중퇴한 후 교육학을 공부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프랑스 몰락의 원인을 “군인들의 체력이 약해서”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이게 근대올림픽의 부활로 연결되었습니다. 쿠베르탱은 당시 발굴된 올림피아 유적지를 연구하며 고대 스포츠를 연구했습니다. 고대올림픽의 종목이었던 투창, 레슬링, 전차경주 등이 전쟁을 위해 훈련하던 기술이었던 것도 쿠베르탱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92년 소르본 대학에서 올림픽의 부활을 선언했고, 1894년 파리에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를 설립했습니다. 그 직후인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을 개최한 거죠. “그리스가 올림픽의 요람이라면, 프랑스 파리는 올림픽의 고향이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회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라는 올림픽 정신이라든가, 근대5종 경기와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라는 올림픽 구호를 정립한 것도 쿠베르탱입니다.

4. 1900년 파리 올림픽은 만국박람회와 함께 개최되었다는데?

1900년 파리 올림픽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일부로 치러졌습니다. 이건 나름 쿠베르탱의 큰 그림이 있었는데요. 만국박람회와 함께 개최함으로써 올림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고대 유적지 올림피아에 있는 석상들, 제전들, 경기장과 체육장들을 다시 복원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요. 그러나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IOC는 대회와 관련한 권한을 1900년 만국박람회와 관련된 모든 스포츠 활동을 감독하는 새로운 위원회에 이양되면서 올림픽이란 말은 쑥 들어가고 ‘국제 운동 및 스포츠 시합’이란 말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각각의 경기를 국제 선수권 대회, 국제 대회, 파리 선수권 대회, 세계 선수권 대회, 파리 만국박람회 그랑프리란 이름으로 보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조차도 자신이 올림픽에 출전한 줄 모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연히 구경 왔다가 선수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엔 메달조차 주지 않다 보니, 심지어 자신이 금메달리스트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을 정도였어요.

5. 어처구니 없는 에피소드들

1900년 파리 올림픽 종목 중에 줄다리기가 있었는데요. 덴마크 선수가 부상을 입으며 선수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에드가 오뷔에는 덴마크의 폴리티켄 신문사 특파원으로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가 그 자리를 채우려 대신 출전했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줄다리기 경기에는 각각 3명씩으로 구성된 스웨덴-덴마크 혼성팀과 프랑스팀만 출전한 상황이라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가졌다고 합니다.

줄다리기 말고 희귀한 종목 중에 스탠딩 점프라는 종목이 있었는데요. 제자리에서 높이뛰기, 멀리뛰기, 3단뛰기를 하는 종목인데, 레이 어리라는 선수가 미국 대표로 출전해 무려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높이 뛰기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했는데 부단한 노력으로 쟁취한 결과입니다.

비공식 경기 중엔 우편마차 경기도 있었습니다. 각 참가자가 2km의 거리를 우편마차를 이용해 편지를 집집마다 배달하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매우 슬픈 에피소드도 있는데, 어느 마라톤 선수가 길을 잃어 경찰관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경찰관은 길을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실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낙심한 경찰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습니다.

진짜 해괴망칙한 종목도 있었는데요. 대표적인 게 비둘기를 사냥하는 사격경기와 인명구조 경기가 있었는데요. 관중들도 있는 공터에 비둘기를 풀어놓고 선수들이 총으로 비둘기를 쏴 맞히게 해고, 인명구조는 실제로 사람을 강물에 빠뜨려놓고 구조하는 경기였는데 둘 다 너무 잔인해서 이후의 대회에선 사라져버렸습니다.

첫 여성 올림픽 챔피언인 테니스 종목의 샬럿 쿠퍼 (출처: 위키백과)

6. 여성 선수가 참가했던 최초의 올림픽이라고 하지만

1900년 파리 올림픽은 여자 선수들이 출전한 최초의 올림픽인데요. 여기에도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당시엔 여자 대회로는 비교적 얌전하게 할 수 있는 골프, 요트, 테니스 정도가 열렸습니다. 여자 골프 금메달은 당시 24살의 미국의 매거릿 애봇 선수가 차지했는데요.​ 당시엔 금메달을 주지 않고 1등상에 해당하는 도자기 기념품을 줬던 데서 웃픈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선수는 195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올림픽에서 우승한 줄 몰랐다고 합니다. 당시 올림픽 운영이 너무 형편없어서, 자신이 했던 골프 경기가 올림픽 프로그램인 줄 모르고 경기를 했던 것입니다. 또 특이한 점은 당시 골프 경기에서 7위는 매리 퍼킨스 선수였는데, 매거릿 애봇 선수의 어머니였습니다. 원래 애봇 선수는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에 유학을 온 상태였고, 어머니가 딸과 같이 지내던 중이었는데, 함께 경기에 나가게 되면서 모녀가 함께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진귀한 기록이 남게 되었습니다.

(출처: Paul Gers의 ‘En 1900’ 중)

7. 파리올림픽과 함께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대한제국을 홍보했다면서?

대한제국이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건 이때가 두 번째입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한 콜럼비아 박람회가 최초인데요. 이 박람회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년을 기념한 행사였습니다. 일본이 1873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빈 세계박람회에서 일본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성공을 거뒀던 걸 지켜보며 고종 황제는 독립 국가로서의 대한제국 이미지를 서구에 알릴 절호의 기회라 여기며 적극적으로 참가하려 했습니다. 주체적인 외교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개화 정책의 일환이었던 거죠.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는 1893년에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를 통해 공식적인 참가 요청을 받으며 시작됩니다. 이때의 일들은 독립신문에도 여러 차례 보도되고 있는데요. 파리와 한양에 각각 준비 위원회를 설치했고, 당시 파리 주재 조선 총영사를 맡겼던 루리나라는 사업가와 의사이며 동양학자인 멘느 박사, 프랑스 공사관의 전직 통역관이었던 모리스 쿠랑을 채용해 2년 동안 박람회를 준비하게 합니다.

대한제국관 건립은 프랑스 측이 주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루리나 총영사가 프랑스의 글레옹 남작이 건립비용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대한제국관 전권을 맡겼기 때문인데요. 글레옹이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대한제국관이 철거될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루리나 총영사의 노력으로 미므렐 백작이 사업을 인수하며 대한제국관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관은 고종황제의 여름 행궁과 인천 제물포의 거리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는데요. 여름 행궁 형태의 전시장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의 수집품, 예술품, 농업, 광산, 산업, 상업 영역의 생산품을 전시했습니다. 제물포 길을 재현한 축제거리에선 조선의 전통주택, 전통상가, 골목길, 그곳에서의 전통축제, 전통 상거래, 거리를 활보하는 조선인들의 모습, 야외 곡예 등 활기있고 역동적인 조선 전통거리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만국박람회 측으로부터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았고, 2개의 금메달, 10개의 은메달,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대한제국관 관련 외신 중에 “전체가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동아시아 건물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 끝과 커다란 지붕의 대한제국관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고 소개한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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