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학(考現學)이란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참된 모습을 규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고현학]은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사안 하나를 주제로,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펼쳐보는 이색코너입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를 중심으로 정리한 넓고 얇은 내용이지만, 일상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의 층위를 높여가 보자구요!
지난 시간에 이어 역사 속 파리올림픽 2탄으로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는 1900년 개최된 제2회 파리 하계올림픽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1924년 제8회 파리 하계올림픽의 고현학입니다.
1. 24년 만에 파리에서 또 올림픽이 개최된 이유
당시 파리 올림픽을 ‘쿠베르탱 올림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데요. 2회 대회가 파리에서 개최된 이유 중 하나가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고국이라서라는 말씀을 드리기도 했죠? 마침 이때가 쿠페브탱 남작이 IOC에서 은퇴를 결심한 때라서 은퇴 전 마지막으로 고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길 바랬던 사심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혼란과 파괴에 휩싸이게 됩니다. 1916년 올림픽은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하기로 했는데, 전쟁 통에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했고, 1920년엔 벨기에의 엔트베르펜에서 올림픽이 열리지만 아직 유럽의 전후 복구가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고, 1900년에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어 대회를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1900년 파리 올림픽이 너무 부실하게 진행되었다 보니 이를 만회하고 싶었던 데다,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함에 따라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다보니 올림픽은 좋은 기회라고 여기던 참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1924년 파리 올림픽은 근대 올림픽의 기준을 확립하는 중요한 대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3,089명의 선수들이 모여 17개 종목에서 126회의 경기를 치렀다고 합니다.
2. 1924년 올림픽에서 올림픽 선수촌이 처음 도입되었다면서?
당시 올림픽 주경기장이 파리 외곽 북서쪽의 ‘콜롱브’라는 곳에 있었는데, 이 근처에 수도 시설을 갖춘 작은 판자집들을 지어 선수촌을 만들었습니다. 집만 지었던 게 아니라 우체국, 신문 판매점, 환전소, 미용실, 레스토랑들도 입주시켜서 선수들의 편의를 도왔다고 해요.
올림픽 선수촌만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새로운 시도가 있었습니다. 우선 올림픽 엠블렘이 처음으로 도입된 올림픽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자로만 올림픽을 표기했으나 전용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올림픽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올림픽 표어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가 처음 등장한 올림픽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프랑스의 교육자 디통 신부에 의해 창안되었고, 쿠베르탱이 이를 올림픽 표어로 도입한 거죠.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활약하는 장면이 사상 처음으로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됐습니다. 이에 힘입어 취재진만 해도 1000명 가까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또 올림픽 주경기장을 1회성으로 사용하지 않고 스포츠 시설로 반복 사용할 수 있게 했던 것도 이때가 처음입니다. 폐막식 행사가 처음 시도되었는데, 폐막식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 깃발, 개최국 국기, 다음 대회 개최국 국기를 게양하는 전통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요.
3. 그 밖에 눈에 띌만한 올림픽 기록은 없을까?
프랑스 ‘파리’라고 하면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죠? 바로 ‘예술’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예술 분야도 올림픽의 일부로 구성됐습니다. 건축과 조각, 문학, 회화, 음악 등 다양한 문화 부문의 대회도 있었고, 메달까지 줬다고 합니다.
자유와 인권의 나라 프랑스에서 열린 대회답게 벽과 천정을 뚫는 기록도 나옵니다. 우선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흑인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합니다. 미국의 윌리엄 드하트 휴바드라는 선수인데 멀리뛰기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합니다. 또 축구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우루과이가 올림픽 축구에 최초로 참가하는데, 유럽을 꺾고 남미가 최초로 금메달을 차지하는 역사를 씁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세계 축구가 유럽과 남미의 양대 산맥으로 성장하게 되고, 월드컵 개최로 이어지게 됩니다.
4. 육상 5관왕, 수영 3관왕이 나오기도 했다는데?
또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 선수가 육상 분야에서 5관왕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힙니다 당시 파리는 기록적인 무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섭씨 45도까지 기온이 올라가기도 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누르미 선수는 회복 시간 없이 2시간 사이에 2개의 메달을 따는 등,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중들에게 감동을 선물했다고 해요. 더위보다 더 뜨거운 이열치열의 올림픽 열기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또 1924년 올림픽 수영분야에서는 세계 최초로 50m풀과 다이빙대를 도입하는데, 미국의 조니 와이즈뮬러 선수가 새로운 수영 경기장에서 100m 자유형, 400m 계영, 800m 계영에서 금메달을 따 수영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3관왕에 오르게 되었는데요. 이로 말미암아 올림픽 종목에서 수영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5. 올림픽 수영 3관왕에서 유명 영화배우로...
조니 와이즈뮬러 선수는 12년 뒤인 1932년 영화 <타잔>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세계적인 스타가 됩니다. 조니 와이즈뮬러가 연기한 타잔은 ‘아~아아아아’하는 포효로 지금까지도 유명한데요.
감독이 와이즈뮬러 선수를 캐스팅한 이유가 재밌습니다. 야생에서 자란 타잔 역할은 대사가 없기 때문에 연기력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멋진 몸을 지닌 배우가 필요해서 헐리우드 배우가 아닌 수영 선수였던 그를 발탁한 건데요. 대사가 없다보니 나름대로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아~아아아아’하는 포효를 하게 된 겁니다. 이게 대 히트를 치면서 타잔 영화에만 12편 출연하게 되었다고 해요. 즉 1924년 파리올림픽은 원조 짐승남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는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것 말고 1924년 파리올림픽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6. 영화 ‘불의 전차’
이 영화 봤다고 하시면 연식이 드러나는데요, ‘주말의 영화’, ‘명화극장’같은 방송으로 보신 분들일 겁니다. 그런데 옛날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직도 수작으로 꼽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1982년 아카데미 4개부문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해요. 특히 주제음악이 유명해서 CF라든가 행사장 음악으로 들어보셨을 겁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영국 육상 대표팀 두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에릭 리들 선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해럴드 아브라함 선수는 독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리들 선수는 주 종목이 100m였는데, 주일인 일요일에 경기가 있다는 이유로 경기를 포기하면서, 거의 매국노 수준으로 욕을 먹습니다. 대신 400m 경기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면서 인생역전을 맞이합니다. 해럴드 아브라함 선수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출전하기도 했는데, 금메달을 따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지요.
7. 진귀한 에피소드는 없었을까?
권총 사격 결승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0초 안에 6발의 총알을 쏴야 했습니다. 마침 결승전에 출전한 미국의 베일리 선수의 총구가 불발탄에 막혀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다행히 침착하게 불발탄을 빼내고 남은 5발을 총탄을 명중시키긴 했습니다. 1발이 모자라니 결승전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상대 선수가 2발을 빗나가게 쏘는 바람에 베일리 선수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밖에 마라톤 풀코스를 42.195km로 확정지은 것도 1924년 파리올림픽부터입니다. 188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40km,1900년 파리올림픽은 40.26km, 1920년 앤트워프올림픽에서는 42.75km 등 대회마다 코스 길이가 제각각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라톤의 기원을 기원전 490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중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휘디피데스라는 병사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1.195km를 달려가 승리를 알리고 숨졌던 것을 기리기 위해 열린 경기라고 알고 계시는데요? 이건 사실과 다릅니다.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36.75km라고 하고요. 휘디피데스라는 병사는 죽지 않고 건강히 살다가 여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실은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의 음모라고 하는데요. 근대올림픽을 창시하기 위해 젊은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휘디피데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꾸며냈다는 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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