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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읽어보기(5)] 작별하지 않는다: 실재인가? 환상인가?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4.11.05 15:48 의견 0

경하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인선이 연락한다. 병원으로 빨리 와 달라는 이유로. 급히 도착한 경하는 인선의 안위를 걱정하며 등장한다. 작업 중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된 인선이 제주에서부터 육지로 와 봉합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러고서 하는 말이 자신의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먹을 걸 주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앵무새를 걱정한다. 오늘 중으로 도착하면 앵무새는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제주로 향한다. 눈보라가 치고, 눈으로 쌓인 길을 걷고. 결국 도착하지만, 죽어있는 앵무새를 본다. 이후 경하가 경험한 이야기는 실재와 환상을 오간다. 과거 회상, 그리고 인선의 작품 활동 등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주의 비극, 빨갱이를 모조리 소멸하기로 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잔혹극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대로 기억하자!

『소년이 온다』는 ‘소년을 기억하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다. 제주의 비극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기억에서 완벽한 종합은 있을 수 없다. 흩어진 조각조각의 기억들이 사람의 뇌 속에서 선택되어 맞춰질 뿐이다. 우리는 이런 인간의 성향을 ‘편견(bias)’이라고 한다.

작가는 제주 4·3사건을 되살리고 있다.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당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국가가 국민을 죽이고 고문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도대체 국가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많은 국민을 살해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일까?

100번 양보해서 빨갱이 집단이 있다고 하자. 그래도 그들을 죽이고, 소멸할 명분과 정당성이 국가에 있었을까? 물론, 이런 만행에 대한 집단의 동조는 더 무섭다. 작품 속에는 숨겨주는 이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더 황당한 것은 일제 때, 일제에 동조해서 민족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다시 활개를 쳤다는 점이다.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 대로 고문을 한다고.”

고문을 해도 시원찮을 매국노가 다시 득세한다. 바로 그 비극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이제 세월이 더 흘러, 매국노의 자손이 득세하는 시대가 됐다. 그들의 득세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냥 두고 볼 뿐이다. 작가는 이런 사실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잊으면 안 된다고 계속 독자들을 다그친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인생이 뭘까? 나는 자연스럽게 사고한다. 그래서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인가? 그래서 사고의 주인공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인생은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나는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내 부모를 내가 선택할 수도 없었다. 이미 태어난 순간, 내 인생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수레는 정해진 대로 굴러간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이 원해서 그곳에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산 게 아니다. 작가는 이런 인생과의 화해를 거부한다.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살아야 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산다는 의미, 죽어가는 내 부모, 내 형제들을 봤는데 그런 잔혹한 장면을 지켜본 사람 중에 살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죽지 못하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의미는 능동적 의미로 꼭 살아야겠다는 의지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죽음의 부당함을 전하겠다는, 혹은 그런 만행을 기억하겠다는 의지이다.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작별은 멀어져 가고, 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지난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잊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지 않은 기억은 잊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대개는 그렇게 설명하고,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고쳐 쓴다. 과거의 아픔을 직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나는 연인과 행복했던 추억이 있었던 자리를 일부러 찾았다. 그러고 나서 웃고, 울기도 했다.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고, 전 연인과 함께했던 자리를 다른 연인과 같이 올 수도 있었다. 트라우마는 어쩌면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직면할 때, 소멸하는 언어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을 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동물이나, 자연이 아니다. 대부분 인간이 만든 물건이 인간을 더 쉽게 해한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 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총알 한 발이면, 10명을 죽일 수 있다. 총칼 앞에 대항하는 인간의 무기력함과 나약함, 그런데 그런 총칼 앞에서 당당히 직면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생은 비록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지 않지만, 그 인생이 굴레에 올라탈 수 있는 존재도 인간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인선은 잘려 나갔다가 봉합 중인 손가락 두 개의 아픔을 느끼며,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 본다. 육체적 아픔이 다일까? 무고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가족과 지인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내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이 소멸했다. 어느 순간 나는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혼자가 된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육체적 아픔은 진통제를 먹으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새살이 돋는다. 그러나 가족을 잃은 슬픔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의 고통이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윌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고통을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상실의 아픔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내 앞에서 죽어간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을 잊을 수 있을까? 아마 잊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을 앓고 있을 것이다.

◆실재와 환상

경하는 인선의 집에 도착했다. 새는 죽었고, 새를 묻었다. 그런데 다음 날 새가 살아났다. 그리고 인선이 그녀 앞에 서 있다. 경하가 인선을 만나 제주로 가서 새를 묻어 준 게 실재일까? 아니면, 경하 앞에 보이는 새와 인선이 실재일까?

“서울에서 내가 받은 문자와 이 섬에서 겪은 모든 것이 망자의 환상이었을 뿐이라고.”

작가는 환상이길 바란다. 실재라고 한다면, 너무 괴로운 일이니까. 광주에서는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아픔으로 수십 배가 넘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제주는 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광주보다 더 잔혹하다.

빨갱이를 소멸한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도 죽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은 빨갱이 트라우마로 여전히 새로운 빨갱이를 만들어 댄다. 정작 빨갱이의 상징색이 붉은색인데, 붉은색을 상징으로 하는 당에서 빨갱이를 조작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 남북은 평행선을 달리다가 이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평행선은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만날 수 있는 점이 생긴다.

하지만, 좀 더 밖으로 벌어진 선은 한 점으로 모이기 어렵다. 환상은 바람이다. 새의 부활. 그러나 실재는 부활이 아니다. 새는 죽었고, 무덤이 남았을 뿐이다. 왜 경하는 인선의 문자와 제주행을 환상으로 서술해야 했을까? 그리고 새의 죽음과 부활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다 설명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70년도 더 지난 일과 작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까? 실재는 이미 다 지워져 버린 과거사인데, 그래서 되새겨 보는 일은 환상과 같다는 것일까? 아니면, 실재를 좀 더 과장한 작가 소설에 대한 변명일까? 내 소설은 결국 환상이다라는 의미를 함축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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