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조선의 정치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훈구세력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중앙 정계를 장악해 온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한양에 거주하며 현실정치와 부국강병을 중시했고, 왕권을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반면 사림세력은 지방의 향촌을 기반으로 성장한 새로운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적 도덕 정치를 강조하며 훈구세력의 권력 독점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연산군 시기부터 본격화되어 중종 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중종 때 일어난 조광조의 개혁과 기묘사화는 이들의 갈등이 얼마나 첨예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세력은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점차 그 영향력을 회복해갔습니다.
■ 대윤과 소윤의 정치적 대립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는 표면적으로는 윤임 일파와 윤원형 일파의 대립으로 나타났습니다. 중종의 두 계비는 모두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었는데, 제1계비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제2계비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각각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라 불렀습니다.
이 대립은 단순한 개인 간의 반목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윤임은 사림 세력과 연대하여 도덕정치를 표방했고, 윤원형은 훈구 세력의 기득권을 대변했습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은 이언적, 유관, 성세창 등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사림 세력은 오랜 정치적 시련을 벗어나 마침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잡은 듯했습니다.
■ 권력 구도의 급변
그러나 역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1544년 말, 재위 불과 8개월 만에 인종이 갑작스레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 정국의 주도권은 급격히 소윤 측으로 기울었습니다.
같은 파평 윤씨 가문 사람들이었지만 ‘대윤’ 윤임은 인종의 외척이었고 ‘소윤’ 윤원형은 명종의 외척으로, 외척 간의 다툼이면서 더 복잡한 정치적 구도의 산물이었습니다.
당시 예조참의였던 윤원형은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는 지중추부사 정순명,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치밀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특히 그의 첩 정난정은 문정왕후와 명종을 교묘하게 설득하여, 윤임 세력을 제거할 명분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윤임 일파가 어린 명종을 폐위하고 인종의 아들을 옹립하려 한다”고 모함했습니다. 물론 이는 사실무근이었으나, 문정왕후의 불안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 을사사화의 참상과 영향
이후 윤원형의 공격은 신속하고 무자비했습니다. 먼저 형조판서 윤임과 그의 측근인 이조판서 유인숙, 좌의정 유관 등을 반역 음모죄로 몰아 유배 보낸 뒤 처형했습니다. 이어서 계림군을 이 음모와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제거했고, 심지어 명종의 이복형인 봉성군마저 왕위 찬탈을 꾀했다는 혐의로 처형했습니다.
사화의 광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윤원형은 전직 주서 이덕응을 협박하여 무고자로 내세웠고, 이를 통해 수찬 이휘, 부제학 나숙, 참봉 나식, 정희등, 박광우, 사간 곽순, 정랑 이중열, 이문건 등 수많은 관리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사화의 여파는 6년이나 지속되었고,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심각한 것은 을사사화가 조선의 정치 문화에 미친 장기적 영향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외척 세력의 전횡이 더욱 심해졌고, 정치적 논쟁이 극단적인 피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고착화되었습니다. 또한 사림 세력 내부의 분열도 심화되어, 후일 동서붕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이순신의 탄생과 성장
그러나 이 암울했던 1545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 희망의 씨앗이 뿌려진 해이기도 했습니다. 후일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이 된 이순신이 한양의 건천동에서 4월 28일(윤음력 3월 8일)에 태어납니다.
이순신의 가문은 원래 문반 출신이지만 무과에 응시해 무반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중종 때 평시서 봉사를 지냈으나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 또한 벼슬에 나가지 않아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에만 건천동에 머물렀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장합니다.
■ 을사년이 남긴 교훈
을사사화는 조선 전기 네 차례에 걸친 사화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외척 세력의 정치 개입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며, 이후 조선 후기 당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훈구 세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붕괴된 것 같았지만, 이는 후대 임금인 선조 때 역전되고 맙니다.
1545년 을사년은 정치적 암흑기와 미래의 희망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을사사화가 보여준 정치적 갈등의 위험성과, 이순신의 탄생이 상징하는 작은 희망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을사사화와 이순신의 대비는 권력 투쟁에 몰두한 정치 세력들의 몰락과,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 이순신의 위대함을 겹쳐보게 만듭니다.
다음 회 1605년의 을사년은 시선을 17세기 초 유럽으로 옮겨,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적 혁신과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출간으로 대표되는 시대의 변화는, 근대 문학과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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