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1725년: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 실험

※연재: 여덟 번의 을사년이 말하는 것 5회

방랑식객 진지한 승인 2025.01.18 11:35 | 최종 수정 2025.01.20 03:37 의견 0
영조 어진. (출처: 위키피디아)

■ 영조의 즉위와 탕평의 시작

1725년 을사년, 조선에서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45세로 즉위하게 된 영조는 즉위교서에서 "편당을 없애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영조가 직면한 정치적 현실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복잡한 정치적 사정 속에서 즉위할 수 있었던 건 노론의 지지를 받은 것이었지만, 소론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왕세제 시절 겪었던 신임사화(1721)의 경험은 당쟁의 폐해를 깊이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조는 탕평책을 자신의 핵심적인 통치 이념으로 삼게 됩니다.

옹정제 (출처: 위키피디아)

■ 청나라 옹정제의 새로운 통치

같은 해, 청나라에서는 강희제의 뒤를 이어 옹정제가 즉위했습니다. 옹정제는 청나라의 세 번째 황제였지만,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강희제는 생전에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황위 계승을 둘러싼 긴장이 있었습니다.

옹정제는 즉위 후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군기처라는 새로운 비서기구를 설치하여 황제 직할의 행정체계를 만들었고, 한인 관료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실용주의적 접근이었습니다. 옹정제는 이념적 논쟁보다는 실질적인 통치 효율을 중시했고, 이는 청나라 전성기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두 통치자의 공통점과 차이점

영조와 옹정제는 흥미로운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통치자 모두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둘 다 실용적인 통치 방식을 선호했으며, 이념적 대립보다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뚜렷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추구했다면, 옹정제는 보다 직접적인 황제 중심의 통치를 지향했습니다. 영조가 사대부 계층과의 타협을 통한 통치를 모색했다면, 옹정제는 황제권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 18세기 동아시아의 전환기적 성격

1725년은 동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기였습니다. 청나라는 강희연간의 안정을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해 나갔고, 조선은 숙종대의 당쟁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했습니다. 한편,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막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독특한 쇄국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기에 나타난 실용주의적 경향입니다. 이념적 대립이나 형이상학적 논쟁보다는 실질적인 통치와 민생 문제 해결이 중시되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 사회가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다음 회에서는 1785년의 을사년으로 넘어가, 미국의 달러화 채택과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세기 말의 세계사적 대전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동아시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함께 고찰해보겠습니다. (계속)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