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동독 국내 분위기에서 10월 7일 동독 창건 4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동독 건국 이래 최대의 군사 퍼레이드였다. 대내외에 호네커의 사회주의통일당과 동독정권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독군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때 소련군과 함께 나토군의 일원으로 프라하로 진입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53년 동베를린 소요 때 소련군과 함께 무력 진압에 나섰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고르바초프는 7월 6일 동독이 위기에 빠질 때 동독을 지원한다는 소련 측의 확약을 파기하면서 동독의 소요를 방지하기 위한 소련 군부대의 개입을 거부했다. 고르바초프는 바르샤바조약 회원국의 국내소요 시에 회원국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개입하겠다는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과는 거리를 두고, 회원국의 국내 문제는 각국의 독자적인 결정에 맡기겠다는 자신의 방침을 농담조로 시나트라의 노래 ‘마이웨이’(My Way)에 빗대어 ‘시나트라 독트린’이라 불렀다.

40주년 기념식 밖에서는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월요시위 참가자는 점점 불어났다. 10월 16일 12만 명에 달했고, 10월 23일에는 호네커가 축출되고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서기장으로 취임하였다. 10월 23일 월요시위 참가자는 30만 명으로 늘어나고 여기서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등장하였다. 11월 4일 베를린에서는 10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11월 9일 밤에서 10일 새벽에 걸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되었다.

여기서 동독 민주화운동의 배경이라 볼 수도 있는, 당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진영의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1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시작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은 이미 1988년에 자유노조의 파업이 시작되면서 1989년의 혁명을 예고하였다. 2월부터 시작된 공산당 정부와의 원탁회의는 4월에 이르러 6월에 자유총선을 실시하기로 하는 합의에 이르렀다.

중국에서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진입하여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하기 시작한 6월 4일 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압승을 거두면서 폴란드인민공화국은 붕괴되고 폴란드 3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헝가리에서는 5월에 국경이 개방되고 8월에 노동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10월에 민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헝가리의 국경 개방으로 1989년 8월부터 동독 주민들은 헝가리를 거쳐 서독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9월에 3만 명 이상이 빠져나가자 동독 정부는 헝가리 국경을 폐쇄하였다. 그 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탈주가 이어지자 11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도 폐쇄하였다.

그런데 공산주의 종주국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르샤바 조약국의 국내 문제에 집단으로 개입하겠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대신 소위 ‘시나트라 선언’을 내놓고 각국 문제는 각국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다. 1985년 3월 노후화한 소련체제를 물려받고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안으로 정치와 경제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선언하였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본 연재는 인터넷신문 <제3의길>에 기고된 "독일 통일의 경험"을 재구성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