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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32)] 지지기반이 약한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으로 실각하다(하편)

이동진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이야기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2.20 15:52 의견 0

☞이동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초창기에는 세도정치와 관련된 일부 안동 김씨와 조대비를 필두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흥선대원군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의 지지 없이는 권력을 유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흥선대원군을 지지해줄 만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집권기간 동안 쇄국정책을 고집합니다. 서양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고수하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대비의 수렴청정 덕분입니다. 궁궐의 가장 웃어른인 조대비가 여성이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에게 권력을 양분했죠. 조대비는 1863년부터 1866년까지 약 3년간 수렴청정을 지속합니다. 흥선대원군도 이에 따라 1866년, 왕권에서 물러나는 것이 상식적이죠.

▲ 산청척화비 (山淸斥和碑).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전국의 주요 도시에 세웠다. ⓒ 문화재청


그러나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로 대원군의 정치적 생명이 연장됩니다. 66년에는 병인양요, 70년에는 신미양요까지 외세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죠. 병얀양요와 신미양요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 사대부 세력에게 일부 인정되어 흥선대원군의 지지기반을 탄탄하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국제적 변화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1863년엔 일본이 개항을 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며 중국은 남경조약을 기준으로 거의 20년이 된 해이죠. 당시 천하의 중심이라 여겨졌던 청나라도 개항을 했던 상황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런 국제 정책 흐름 변화에 대해 무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쇄국정책이란 다른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나라의 문을 닫는 정책을 말한다.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외국의 통상요구는 나라가 위험에 처한다고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주변국가들이 개항하면서 중국의 경우, 전쟁에 지면서 통상수교를 허락하는 모습을 보자 흥선대원군은 문호를 더욱 단단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으로 보인다.


☞이동진: 흥선대원군은 사대부들의 마음을 잃으면서 정치적 기반이 약해지며 정책또한 백성들에게 외면받으며 는 상황에서 고종의 나이가 1873년, 21살이 됩니다. 보통 왕이 18세~20세가 되면 궁궐의 웃어른은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왕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합니다. 명분도 없고 지지기반도 약해진 흥선대원군. 여기에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면서 흥선대원군이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국호를 열었다면 더 빨리 권력에서 멀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양반들은 나라의 문을 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죠.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내칠 명분을 빨리 확보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편, 조선왕조 내부에서 권력의 변동이 일어났다면, 대외관계에서도 1875년 운요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큰 변화가 시작됩니다. 조선 내에도 일부 개화세력이 존재했습니다. 개화기에 중국과 일본으로 파견된 신지식인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죠. 자연스럽게 아버지 보다는 개화를 더욱 의식했습니다. 일본과 맺은 근대조약을 토대로 고종은 조선 내에 자리해있던 개화론을 지지하며 아버지를 권력의 뒤안길로 몰아냅니다.

▲ 강화도조약 관련 보고서.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의 문호를 열게 되었으나, 불평등 조약으로 이후 맺어지는 통상조약은 모두 조선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 국립중앙박물관


운요호 사건이란 일본 군함이 1875년 조선 해안을 연구하겠다는 핑계로 강화도 앞바다로 침략한 사건을 말한다. 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개항하게 된 자신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 조선의 개항을 하는데 그대로 반영했다.

다음해인 1876년 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이 조약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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