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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 기록잡지 ‘그날’의 발행인 박춘림

5.18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 “기억이 기록으로, 기록이 기억으로”②

윤준식 기자 승인 2019.05.16 12:06 | 최종 수정 2019.07.15 14:38 의견 0

▲ 기록잡지 <그날>의 박춘림 발행인. 2015년에 창간호를 냈고 원고와 후원금이 모이는 대로 펴내고 있는 비정기잡지다. ⓒ 김혜령 기자

 

¶ 기록잡지 <그날> - 부채의식으로 시작하다

▶기록 잡지 <그날>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박춘림: 1980년 당시의 저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사람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데모하는 사람 뒤를 쫒아 다니며 맛있는 주먹밥을 얻어먹었던 철부지에 불과했죠. 제게 5월 18일은 2박 3일 수학여행을 다녀온 다음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는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습니다. 보통 무슨 경험을 하고 나면 함께 웃고 떠들면서 기억으로 새기게 되는데, 수학여행 다녀온 후 그런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더 충격적인 일을 겼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겐 근처 고등학교였던 든 살레시오 여고생이 피범벅이 된 교복을 입은 채 태극기를 들고 울며 뛰어가는 모습만 기억납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자였다는 사실이 마음 속 부채의식을 더욱 키웠습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2004년부터는 ‘천상의 열사에게 천 송이 국화꽃을’이라는 나눔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5월 18일에 맞춰 전국에서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까지 걸어서 순례오는 참배객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에게 국화 꽃 한 송이와 생수 한 병을 나눠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분께 “35년 동안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강제진압에 나섰던 마음의 빚을 털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사연을 기고해 달라 요청을 하고 나서 그 글을 싣기 위해 기획한 잡지가 <그날>입니다.

▲ 기록잡지 <그날>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된 글. ⓒ 김혜령 기자

▶잡지 이름을 <그날>이라고 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박춘림: 고민을 많이 했지만 1980년 5월 18일, 그날을 기억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그날>이라는 이름 외에는 적당한 게 없었습니다. 또한 그날의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화해와 용서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번영의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당시 광주에 있던 모든 사람이 피해자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신다면요

☞ 박춘림: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으며 트럭으로 끌려가던 뒷모습입니다. 군인들이 무턱대고 길거리의 사람들을 잡아 트럭에 태웠고, 끌려가지 않으려던 사람은 들고 다니던 몽둥이로 때려 억지로 트럭에 태웠습니다. 학교에 등교했더니 담임선생님께서 가족 중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있는 학생들만 조사하고 귀가조치 시키셨습니다. 거리에는 전두환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만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왜, 무엇을 위해 그런 구호를 외쳐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위가 진압되고 난 5월 27일, 계엄군이 광주 곳곳에 자리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계림동에 살았는데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3층으로 된 파출소 건물입니다. 저희 집 창문으로 바라보니 계엄군의 총부리가 우리 집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너무 무섭고 놀란 나머지 이불을 창가에 쌓아두고 숨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 TV를 틀었습니다. 당시 TV에서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한다는 내용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송을 계속 틀어놓았지만 어디에도 광주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지만, TV 속 대한민국은 오월에 피는 라일락 향기만큼이나 화려했습니다. 광주에 있다는 게 다른 나라 외딴 섬에 갇힌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을 구하러 85년에 서울로 올라왔지만 광주의 이야기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습니다. 직장동료와 상사들은 제가 전하는 광주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일도 있었어”라는 무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직장에서도 점점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고, 한 5년을 사회와 단절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 "그날 광주에 있었던 모든 시민들이 피해자다" ⓒ 김혜령 기자

▶광주에 계셨던 것만으로도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말씀인데요...

☞ 박춘림: 5.18로 인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어야 할 시기가 사라졌습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수학여행 추억도 사라졌고, 재기발랄한 해야 할 청춘기도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시기로 변했습니다. 5월이 되면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꿈 속의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맞아죽고, 트럭으로 끌려갑니다. 스스로에게 방관자라는 낙인을 찍게 만듭니다.

가해자들도 상부의 명령으로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시민입니다. 그런 가해자들에게 상처받고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시민들이 피해자입니다. 또한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함께하지 못했다는 아픔으로 살아간 시민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입니다.

¶ 그날 광주의 모든 기억을 기록하고 싶다

▶<그날>에는 주로 어떤 분들이 기고를 하시나요

☞ 박춘림: <그날>은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잡지인 만큼 그분들께서 원고를 직접 써주십니다. 기고해주시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직 국회의원 분들께서도 관심을 갖고 글을 써주시기도 합니다. 매년 달라지는 5.18의 이슈에 맞춰 주제를 잡고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5.18을 기념하며 만들어내는 잡지인 만큼 특별하게 기억이 남는 사연도 있을 것 같은데요.

☞ 박춘림: 이번 5호에 실릴 이야기인데, 당시 전남 경찰국장이었던 故 안병화 치안감의 이야기를 고인의 자제분께서 정리해서 보내주셨습니다. 안병화 국장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광주 시민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경찰입니다. 나중에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했고 강제로 사직서를 쓰게 했습니다. 10년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돌아가셨습니다. 자제분이 전한 이야기가 시민을 지키는 경찰의 상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 이번 5호에는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故 안병화 치안감을 기리는 원고가 실린다. ⓒ 기록잡지 <그날>

한편으로 안타까운 점은 이 일이 밝혀지며 안병화 국장만 서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안병화 국장과 한 뜻으로 시민을 지킨 경찰분들도 많았고, 그분들 역시 고문을 당하고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는 전혀 회자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들께 작은 서훈이라도 내려드리고, 마음의 보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드러난 피해자들은 국가 보상도 받고, 예우도 받지만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보상을 받는 계기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그날>에 실릴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 박춘림: 이번에 미국의 정보요원이었다는 분이 양심선언을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용기를 가지신 분들께서 묻어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시겠죠. 현재는 내 이야기를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앞으로는 전문가적 시각이 담긴 후배들이 일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인 사초로 기록한 것만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일기처럼 기록한 것도 후대에는 연구에 도움이 되는 사료가 됩니다.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가 지금까지 읽히며 2차 세계대전을 이해하는 기록유산이 되었습니다. 5.18, 그날의 기억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먼 훗날 하나의 역사가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발행된 기록잡지 <그날>. 창간호부터 4호 ⓒ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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