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파크] 불편한 질문, 연상호의 <사이비>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6.07 09:21 의견 0

저수지 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거주민들은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나야 할 처지인데, 보상금으로 어딜 가서 무얼 하고 살지 마땅히 대책도 없고, 고향을 돈 주고 팔았다는 데 대한 죄책감도 무겁습니다.

바로 이때, 보상금을 헌납하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기도원을 건립해주겠다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마을이 물에 잠길 운명이 된 건 천국에 갈 사람들이 한 동네 모여있는 것을 샘한 마귀의 계략이라며 주민들의 먹먹한 마음과 죄책감을 달랩니다. 그리고 '만병을 고치는 생명수'를 팔고 주민들의 눈 앞에서 하반신 장애를 가진 이를 걷게 만드는 등의 기적을 행합니다.

영화 <사이비>의 감독 연상호는 대단히 독보적인 연출자입니다. 인간 내면과 그들이 만들어 낸 세계의 추악함을 애니메이션 으로 들춰내는 예술가죠. 극장 개봉에 성공하는 국산 장편 애니메이션 자체가 흔하지 않은 상황에서, 똑바로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끔찍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자신의 경력을 채워온 그는 '비주류'입니다.

하지만 그가 '흔치 않은' 인물을 넘어 '독보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단순히 소재가 독특해서도, 기법이 남달라서도 아닙니다. 다루고자 하는 소재와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법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고, 그 둘의 융합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매 작품마다 갱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작 <돼지의 왕>과 단편 <창> 모두 그랬지만,신작 <사이비>는 그런 그의 재주가 정점에 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조간 신문 어느 한 켠에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이야기지만 일단 연상호의 손에 소재가 쥐어지면 관객들은 더 이상 '익숙한 이야기'란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지요. 네 <사이비>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낯선 영화입니다.

'악한 자'와 '더 악한 자'의 마찰 그리고 마찰열

<사이비>에서 가장 낯선 것은 극의 갈등 구조입니다. 부조리를 다룬 영화 대부분이 그러하듯 <사이비> 역시 권선징악 따위엔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고 선악의 고정관념을 파괴한다며 나쁜 사람의 착한 면을 보여주는 따위의 1차원적인 입체성을 추구하지도 않아요. 도리어 반대입니다. <사이비>의 인물들 대부분은 전형적이고 단편적입니다.

사기꾼 '성 장로'를 보세요. 그는 절대악입니다. 오로지 악한 생각, 악한 행동만 반복하는 인간이죠. 그에겐 자신에게 속아주는 마을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주어지지만, 그 기회는 모두 유린됩니다. 마을 어르신의 장례 비용을 빌려달라는 목사의 간청을 거절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주동 인물인 최경석 역시 악인이란 겁니다. 그는 마을 주민들 모두가 사이비 종교에 물들어 자기 돈을 모조리 갖다바치는 동안 그나마 상황을 제정신으로 바라보고 이를 외부에 고발하려 애쓰는 인물이지만, 이는 그가 '선한'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사기꾼 일당이 자신을 화나게 했고 그들이 하는 짓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일 뿐이죠.

그의 행동에 굳이 이름표를 붙이자면 '선한 행동'이 아닌 '합리적인' 내지는 '판단력있는' 행동쯤 될 겁니다. 설령 그가 성 장로 일당의 계략을 막아내 마을을 재난으로부터 구해내는 데 성공했더라도 자신의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온 그의 성품은 재평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악인이란 사실 그리고 주위로부터도 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은 대사를 통해 직접 묘사되기도 하죠. 이렇듯 <사이비>는 얼핏 선과 악의 입체성을 다룬듯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두 종류의 악이 빚어내는 마찰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는 작품입니다.

마찰열에 말라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없는 비명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건, 극을 이끄는 두 악의 마찰도 영화가 '진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동력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사이비>의 진짜 관심은 두 악의 마찰 그 자체가 아닌 그 둘이 마찰하며 빚어내는 마찰열에 말라 죽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주로 오판)과 질식입니다.

영화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일개 집단의 내부에서 발생 가능한 거의 모든 군상을 묘사합니다.사이비에 '정말로' 속은 사람, 진실을 알고도 거짓의 효용을 믿기에 '거짓 믿음'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 거짓임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 정확한 사리판단이 불가한 이를 꼬드겨 자신의 행위를 대신하도록 하는 사람까지…. 이렇게 은막 위에 수없이 많은 군상들이 묘사되는 동안 관객은 그들 중 적어도 한 명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 동일시는 매우 불쾌한 것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영화 <사이비>는 그 고통을 직시할 것을 관객에게 주문합니다.

이 난장판의 결말은 당연히 공멸입니다. 첫장면부터 썩 좋지 않은 상황으로 출발한 영화는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향해 끝없이 빠져들죠. 그리고 이야기가 중반을 넘기는 동안 등장인물과 자신의 동일시 작업을 이미 마친 관객들은 결국 후반부의 파국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는 마을이 물에 잠기는 장면은 끝내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갈 길을 잃어버린 동네 주민들의 멍한 서성거림은 '수몰돼 모든것이 침묵에 잠긴 마을'의 시각적 심상과 무척 닮았죠.

왜곡된 믿음에 생존권을 맡긴 이들의 생존을 위한 아우성

이렇게, 단 한 명의 의인조차 없었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오로지 '악과 ,악에 대한 태도'만이 남은 이 마을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밀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거지 상실'이라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비극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먹고 서로가 서로에게 먹히는 기형의 생태계를 이루죠.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맞서 마을 사람들이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상식적이고 건전한 대처는 물론 '연대'였을 것입니다. 사리판단이 정확하고 부동산 서류를 읽을 줄 아는 인물을 주축으로 '보상금 수령 이후'를 함께 토론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비극을 막음은 물론 마을 수몰을 도리어 발판삼아 또 다른 인생을 살아볼 계기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연대가 미처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약점을 간파한 사이비 종교가 끼어들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정확한 판단이 있어야 할 장소에 상식을 벗어난 믿음을 심어버리게 됩니다. 교회에서 주는 물을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나 보상금을 교회에 모두 내어 바치는 행위 자체보다 이게 더 심각하죠. 왜곡된 믿음에 자신의 생존을 내어 맡긴 것이니까요.

불안한 반석 위해 자신의 살 집을 지어버린 이들은 결국 생존을 위해 약한자들을 잡아먹는 길을 택합니다. 최경식을 마귀로 몰아붙이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지체장애인을 이용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끈 사기꾼성 장로를 살해하는 목사. 이들의 행위는 모두 자신의 생존을 쥐고 흔들려는 이들보다 강해져 그들을 '먹어 없애려는' 목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겉잡을 수 없는 파국 속에서 영선이 내리는 극단적인 선택 역시 비록 그 결과값은 '죽음'이지만, '생존권의 자주적 선택'이라는 점, 즉 살고 죽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행위였다는 데 주목한다면 그녀의 자살도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비극을 통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사이비>의 등장 인물들은 종종 정면을 바라보고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면,도대체 난 왜 태어난건가요', '가짜 믿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믿는 사람의 평화로운 표정은 진짜 아닌가요', '왜 보고도 믿지를 못해!' 그러나 영화는 수많은 질문들 중 어느 것에도 명료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결국 <사이비>는 무언가 '말하는' 영화가 아닌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인 셈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물론 관객들마다 다르겠죠. 모두가 모두를 속고 속이는 이 세상에서, 모두가 외면해 온 질문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영화의 작품 외적인 성취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의제에 대한 토론은 <사이비>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감상의 방법이자 재미이겠죠.

영화는 46회 시체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고,지난 21일 국내 개봉해 흥행에 순항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