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27)] 조선왕조의 숙원사업,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지다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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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4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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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은 고종 2년(1865년) 신정왕후가 전교를 내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흥선대원군에게 경복궁 중건을 명령하게 되지요.
신정왕후가 경복궁 중건 전교를 내린 이유는 자신의 남편인 익종이 경복궁 중건을 꿈꿨으나 실패했고, 아들 헌종도 익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공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단명하면서 구체적인 시도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익종은 우리에게 효명세자로 알려진 인물로 박보검과 김유정 주연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여러 번 경복궁에 방문해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 했으나 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대리청정 4년 만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헌종 역시 효명세자의 뜻을 이어받아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시작하지 못하고 끝나고 맙니다.
▲ 신정왕후의 초상. 익종의 왕비이자 제24대 헌종(憲宗)의 어머니. 수렴청정 기간 동안 신정왕후는 주도적으로 정국 운영에 참여하며 왕권 강화와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경복궁 중건을 흥선대원군의 책임하에 추진하도록 하였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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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가 발표한 전교에는 남편과 아들의 꿈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경복궁이 지니는 조선의 정궁이라는 상징성과 조선의 정통성을 세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신들의 의견은 찬반으로 나뉘었습니다.
신정왕후는 경복궁 중건의 총 책임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고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중심으로 공사가 이루어집니다. 영건도감이란 조선시대 국가적으로 이루어지는 건축공사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이었습니다.
영건도감은 최고책임자로 도제조(都提調)를 두고 그 밑에 제조(提調), 낭청(郎廳), 감조관(監造官), 별간역(別看役), 도패장(都牌將)등을 두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영건도감의 주요관직에 영의정 조두순을 비롯해 자신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을 등용합니다.
영건도감은 1865년 4월 13일을 공사의 시작일로 정했습니다. 공사는 순조롭게 이어져 궁궐 곳곳에 주요 건물들을 완성해나가기 시작합니다. 6월에는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 광화문과 궁궐 문의 공사 일정이 잡히며 공사가 순조롭게 이어집니다.
1866년에는 병인양요 등 외국과의 마찰이 빚어지던 시기로 공사가 주춤합니다. 그러나 1867년 다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868년 고종 5년 신정왕후를 비롯해 궁궐 내전의 분들이 경복궁으로 옮겨가며 5년에 걸친 경복궁 중건 사업이 일단락됩니다.
경복궁 중건에는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처음엔 내탕금(內帑金)으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내탕금이란 임금의 개인재산으로 격려금이나 왕실 결혼비용, 구휼사업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개인 재산이기 때문에 사용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회사에서 주는 활동비 명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신정왕후가 대비의 하명이라는 명목으로 내탕금 10만냥을 하사합니다. 이로써 고종 2년(1865년) 4월 13일 공사를 시작하게 되지요.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면서 더 이상 내탕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면서 다른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돈이 ‘원납전(願納錢)’입니다. 원납전은 자발적 기부금으로 처음에는 재상 이하 모든 관원, 백성들을 상대로 걷었습니다. 걷은 액수에 따라 벼슬이나 상을 주었죠. 백성들도 모두 기뻐하며 흔쾌히 돈을 기부했습니다.
이렇게 경복궁 중건은 조선후기의 급변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던 조선후기 최대의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복궁 중건이 흥선대원군의 몰락을 가져다줍니다. 또한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받은 기부금인 원납전은 후에 원해서 내는 돈이 아니라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돈으로 바뀌며 백성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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