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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엘리트주의

4차 산업혁명 시대와 한국 교회(22)

조연호 작가 승인 2019.06.27 11:12 의견 0

한국 교회와 엘리트주의

다음은 교회의 엘리트주의이다. 말 그대로 많은 엘리트 성도가 다니는 교회를 말한다. 엘리트주의는 수적인 성장과 다른 의미에서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아야 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야 하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질적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이유는 돈이 많고, 학식이 풍부해도 질적으로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기때문이다. 물론, 직책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목회자의 목회 지향점에 맞춰 청년부 구성 자체를 좋은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구성하려는 교회도 있었다. 필자가 종로학원 재수생들을 대상으로 사역했을 당시, 학원 근처 교회에서 토요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청년 사역을 담당하던 부목사님이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청년부를 일류대 출신으로 구성하려는 목표가 있는데 담임 목사가 추진하는 방향이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한 인물과 책이 떠 올랐는데,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잘 되는 나"를 참고한 거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필자도 읽어봤는데,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기만 했던 시기에 작가의 말처럼 '세상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인식할 필요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잘 되는 나"는 엘리트를 추종하는 작가의 생각이 여실히 반영 돼 있어서 굉장히 비판 받았으며, 이후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소문과 함께 기존에 있었던 긍정적인 이미지마저도 잃게 됐다.

종로학원 학생들이 그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목사의 엘리트주의였고, 그런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에 교회 공간을 1주일에 2시간 정도 허락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2년 후, 교회는 “예배공간 사용 불가”를 일방적인 통보했다. 이유는 교회 공간을 사용하는 2년 동안 종로 기도회 학생 중 단 한 명도 그 교회에 출석한 학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명품과 웰빙을 추가할 필요가 있을까

한때 ‘명품교회’, ‘웰빙교회’와 관련한 설교를 교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명품은 말 그대로 부자들의 전유물이다. 서민들이 명품을 소유하고 있으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된장녀’ 등과 같은 표현은 부자들이 명품을 휘감고 다닌다고 해서 생긴 말이 아니다. 충분한 수입이 없는 사람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명품을 밝힌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명품교회’는 서민 성도를 배제한다는 교회의 암묵적인 구호이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헌금 안 낼 거면 오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차원에서 명품주의를 의미하는 거라고 아우성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정직하게 따져보자.

한국 교회는 노숙자가 교회에 출입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왜냐하면, 적응하기 힘든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로 비싼 땅에 우뚝 서 있는 교회에 가 보라! 서울시 전역에 노숙자 수가 수십만 명일 텐데, 단 철옹성과 같은 그 교회들에 단 한 명의 노숙인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예배 시간에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는다. 그들이 예배드리는 공간은 별도로 마련 돼 있다. 예수의 신부로 자처하면서 세워진 교회는 예수가 만나고 만져주고 치료해준 사람들은 버리고, 오히려 외식하는 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명품교회’는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는 교회의 다른 명칭일 뿐이다.

‘웰빙교회’는 그 뉘앙스만 따지면 인간 복지와 관련한 언어여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의미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웰빙의 조건은 중산층 이상인 사람을 전제로 한다(물론 앵거스 디턴과 같은 학자는 웰빙의 의미를 확장해서 해석했다). 생존과 관련한 말이 아니라 기본적인 의식주는 이미 충족한 후에 더 부유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들었을 때 ‘아멘’ 할 수 있는 언어이다. 역시 예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교회가 사용하기에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 사용하기에는 괴리가 있는 “명품”, “웰빙”이라는 언어가 사용될까

한국 교회 성장과 엘리트주의는 자본주의와 연관이 있다. 성도가 늘어야 헌금이 늘어나고, 엘리트가 많아야 헌금 액수가 커진다. 물론, 변명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물질을 좋은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믿기 힘든 이유를 댄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금세 허울뿐임이 금세 밝혀진다. 교회 재정의 극히 일부만이 구제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재정의 20%도 사회 구제 등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권력을 추구했다. 그래서 권력의 핵심 원인을 감지할 수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즉, 이 시대 권력의 핵심이 ‘돈’이라는 걸 파악했기에 돈과 관련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자본주의를 언급할 때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성장과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바탕으로 한 그릇된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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