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평화공원 이전 20주년 맞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윤준식 기자 승인 2019.08.06 19:57 의견 0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의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출처: 위키백과)

매년 8월 5일은 한국인원폭희생자를 기리는 날

해마다 8월이 다가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다시 한 번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한다. 한일합방 후 일본으로부터 36년간의 식민지배에 놓였다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통해 압제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이었던 8월 15일을 ‘광복절(光復節)’이라 부르는데, ‘빛을 되찾았다(光復)’고 이름을 붙였을 만큼 민족과 나라가 어둠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일부 지식인들이 변절해 친일로 돌아섰을까? 한 세대에 해당하는 지배 가운데 해방의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황국신민이 되는게 자기자신과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 여긴 이들도 많았다. 그러니 광복(光復)이란 말 외엔 대한독립의 기쁨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 때문에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있는 날이 있으니, 바로 세계 최초의 핵무기가 일본 땅에 투하된 날인 8월 6일이다. 

점점 광기로 치닫은 2차 세계대전 

1945년 5월 1일 독일의 히틀러가 자결하자 독일군은 5월 7일 연합군에 항복하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마무리된다. 유럽전선에 투입되었던 연합군의 전력이 일본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재투입되었다. 독일이 패망하던 당시의 일본군도 패색이 짙었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미 1942년 6월 초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기동함대가 패배하며 주력 항공모함 모두를 잃어버리며 이미 패배를 향해가고 있었다. 1944년 말에서 1945년 3월 말까지 벌어졌던 이오시마 전투의 패배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격이 임박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항복 직후인 5월 16일 벌어진 페낭 해전을 끝으로 일본 해군은 해군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다. 4월 1일 개전해 6월 22일 끝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8만 여명의 전사자가 나오고 10만 명의 민간인 희생이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는다. 

오키나와 함락은 곧 연합군의 본토상륙이 이루어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본 본토 공습을 개시하면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 싶었던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려했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일본은 자국민에게 옥쇄(玉碎;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표현으로 명예와 충절을 지키며 죽으라는 의미)를 강요하며 여전히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정치적인 계산 때문

결국 미군 폭격기가 일본의 도시 상공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기에 이른다. 미국의 경우 이미 이오시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종전을 앞둔 마당에 더 이상의 희생을 감수하기 싫었고, 이미 핵무기 개발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기에 실전 경험을 갖고 싶었던 정치적 계산이 이를 결정지었다. 히로시마가 첫번째 원폭 투하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이전에 폭격을 하지 않아 원폭 투하 전과 후의 파괴력을 비교하시 쉽다는 이유 단순한 때문이었다.

결국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최초의 핵무기가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상공 580m에서 폭발했다.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1.6㎞ 이내의 모든 것이 소멸되었고, 그 밖의 건물들도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폭발과 동시에 7만 명이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상과 방사능 피폭 등으로 7만 명의 시민들이 더 사망하게 된다.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가 25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도시 전체가 지옥으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원폭돔.

원래 히로시마 물산 장려관이 있던 자리로 구리로 덮인 철골의 타원형 돔이 있던 5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원자폭탄이 터진 중심에 위치한 덕분에 측풍의 영향을 받지 않아 폐허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의 결의에 따라 영구히 보존하게 된다.  (출처: 픽사베이)

전쟁이 끝난 후 도시재건에 나선 히로시마는 인류가 원폭투하와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경각심을 높이면서 세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평화공원과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게 된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은 1950년부터 1964년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되었다. 가장 큰 상징물이 된 평화기념관은 1955년에 건립되었고, 원폭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를 비롯해 평화를 기원하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공원 내부에 설치되었다.

한편,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 등 14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67년 결성된 원폭피해자협회가 조사해 1972년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히로시마 원폭으로 총 5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3만 명이 사망했다.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원폭 피해자 윤병도(尹炳道)를 중심으로 히로시마 거주 재일한인이 뜻을 모아 히로시마 시에 위령비 건립계획을 제출했고, 이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본부 주도로 ‘히로시마한국인희생자위령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 재일한국인들의 모금운동으로 250만 엔 규모의 건립비용을 조성해 1970년 4월 10일에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와는 비교되지 않는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평화공원 내부의 원폭 희생자 위령비  (출처: 픽사베이)

죽어서도 차별받는 조선인

원래 건립위원회는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한국인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려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시는 “이미 평화공원 안에 각종 위령비와 기념비가 많아 허가해줄 수 없다”는 석연치 않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이로 인해 위령비는 당시 히로시마에서 일본군 정보장교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의친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공이 피폭된 채 발견된 장소인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相生)교’ 근처에 세워지게 된다. 

이들은 위령비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겨 넣음으로써 망자와 남겨진 자의 설움을 대변했다. 
 
“(전략)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 공 전하를 비롯하여 명분 없는 싸움에 명분 없이 죽음의 마당으로 향해야 동포 군인들, 괭이와 낫을 들고 마소같이 부림을 받던 동포 징용자들, 유리인걸 삶을 찾아 여기로 모여든 동포 남녀들 아마도 도합 오만은 되리라고 믿어지는 가여운 군상들 (중략) 이 참극으로 귀한 생명을 잃으신 이우 공 전하 외에 무고한 동포 이만 여 위 그 일이 있은지 이십유오년(二十有五年)에 아직 혼령의 쉬실 곳도 마련하지 못 한 채 임염(荏苒) 오늘이 되었으니 두려워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이하 후략)” 

또한 위령비와는 별도로 위령비의 유래를 알리는 표지석도 설치했다. 표지석에도 “(전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서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투하로 인해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았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 수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 (후략)”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문구에서 “한국인 희생자위령제는 매년 8월 5일 이 장소에서 거행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시각인 8월 6일 8시 15분에 열리는 일본인들의 위령행사와 구분함으로써 다른 한 편으로 죽어서도 차별받는 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위령비 건립에 25년, 평화공원에 이전에 29년, 그 후 20년

이후 재일한인은 물론, 일본의 뜻 있는 시민들도 나서 한국인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으로 이관하라고 꾸준히 요구한다. 1990년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방일 이후에서야 정치적인 계산에 들어간 일본 정부가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다. 한국인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으로 옮기는 운동이 힘을 얻게 되었고 1998년 12월 히로시마 시의 승인을 얻게 된다. 

이에 따라 이전 공사를 위해 또 한 번의 모금을 거쳐 1999년 7월 21일에야 비로소 오늘과 같은 장소에 위령비가 자리 잡게 되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있다. 관광차 히로시마를 찾았다가 한국인 위령비에 참배하기 위해 들른 이들에 따르면 한국인 위령비가 있는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어김없이 8월 5일 거행된 제50회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제  (사진: 키타무라 메구미)

어제인 8월 5일, 어김없이 현지의 한인 대표단과 일부 일본 시민들이 모여 제50회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제를 가졌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현 본부 이영준 단장은 추도사를 통해 “타국에서 희생되신 희생자들과 피폭으로 인해 힘든 삶을 이어가시는 여러분의 억울함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후손들에게 한반도의 핵무기를 없애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제를 해결하고 한일우호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히로시마 민단은 핵 폐기운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고령의 나이가 되신 피폭자 선배님들의 체험경험담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인 위령비가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자리를 잡은 지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위령비 하나 옮겨진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작게 볼 일이 아니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는 전쟁의 참상, 특히 핵과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정부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국민과 일반시민들의 소소한 삶이 무참히 파괴되는지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범국가 일본이 치러야했던 대가를 상징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식민지배에 놓인 피지배국가와 민족이 겪어야 했던 처절함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지 한국인들만이 아닌 일본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한국인 위령비가 평화공원 내부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국가나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민감한 문제를 양국 시민들이 중심으로 상호화합과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한 걸음을 이룬 상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같이 한일 간의 갈등이 심할 때일수록 이 일은 귀감이 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제50회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제  (사진: 키타무라 메구미)

사실 <시사N라이프>는 1년 전에 이번 20주년을 맞아 히로시마 현지 방문을 비롯한 특집기획을 한 바 있었다. 히로시마의 한인 단체와 일본 시민단체를 취재하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원폭피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년인 21주년에라도 기획을 살릴 수 있길 바라는 심정이다. 특히 연로하신 원폭피해자 분들의 여명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라도 시급하다. 반드시 본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취지의 보도가 타 매체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일본 현지에서 도움을 주신 키타무라 메구미씨에게도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