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노인이 거대한 물고기를 대상으로 승리의 기쁨과 복잡한 심경에 잠긴 시간도 잠시. 곧 상어 떼의 습격을 받게 된다. 거대한 물고기의 죽음과 혈흔은 상어 떼에게 GPS와 같았다. 첫 번째 공격에서 노인은 잡은 고기의 4분의 1을 잃는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노인이 집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거대한 고기의 살코기는 단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노인은 이제 결정적으로 패배했음을 알았다.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패배했다.” <노인과 바다> 중
노인은 패배를 선언한다. 이렇게 될 것을 인생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았을 텐데,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노인에게 고기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고백처럼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그 자존심을 위해 노인은 얻을 게 없는 사투를 벌인 것일까?
소설 말미(末尾)에 노인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써 어느 정도 자존심은 건진 셈이다. 고기의 거대한 뼈가 남았기에 그가 어떤 고기를 잡았는지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고기를 잡느라 며칠 마을을 비운 사이 주민들이 근심하면서 수색했다는 사실에 나름 괜찮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스스로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무시 받는 늙은이로 전락한 상황에서 타인에게 받는 관심은 거대한 고기를 잃은 상실감을 대체해 줄 수 있는 새로운 힘이었다.
이제 다시 고요한 시간이 찾아온다. 노인에게 다시 바다가 보인다.
“때에 따라서는 아니지만.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 노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도 있지. 하고 생각했다. 침대는 내 친구거든. 침대가 말야.” <노인과 바다> 중
<노인과 바다> 문학동네 판 (교보문고 제공)
바다는 여전히 변덕스러운 존재다. 그러나 이제 친구 같은 ‘침대’가 된다. 바다같은 침대는 거대한 침대다. 바다는 변덕스러운 게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여길 뿐이다. 노인은 바다의 온유함과 난폭함을 모두 맛봤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인간이 바다를 알지 못해서 변덕스러움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노인처럼 바다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도 목전에 있는 고기를 두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누추한 침대에 몸을 누일 때에서야 바다가 친구가 되고 침대가 된 것이다.
◇큰 고기는 욕망일까?
작가는 큰 고기를 인간의 허영이나 탐욕이라고 생각했을까? 죽는 날까지 버리지 못하는 탐욕. 혹은 아니면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이 말하는 욕망일까?
인간은 스스로 무덤으로 갈 날을 정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허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무기력하고 허무한 삶에 목표, 목적이 생기면 달라진다. 이름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은 ‘불멸(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참고하면 좋다)’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죽더라도 뭔가를 남기려 하기에 인간은 본인이 머문 시공간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한다.
당장 보이는 거대한 고기에 몰입할 수 있기에 거대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결국, 패배할 걸 알고 시작한 전쟁이지만 인간은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승리의 기쁨을 위해서 정해진 최후 결과에 그대로 승복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일 수 있다.
◇뭐가 옳을까?
죽음을 기다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죽음까지의 과정은 큰 차이가 있다. 죽으면 다 똑같다고 말하지만, 물리적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구별 짓기’ 위해 살고, 죽는다. 그리고 차이는 돈, 명예, 자존심, 출세, 영향력 등으로 나타난다.
거대한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노인과 거대한 고기, 그리고 수많은 상어 떼는 모두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름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투를 개시한다. 평등하되, 차이가 있어서 구별할 수 있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거대한 바다를 품고 사는 사람에게 차이는 인간의 탐욕일 뿐이다. 그러나 거대한 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에게 욕망은 구별 짓기 위한 에너지다. 그러다가 어느덧 노인이 되면 바다를 볼 수 있는 혜안도 있지만 당장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만용(蠻勇)을 부릴 때도 있다.
어떤 시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독자의 몫이고 그 책임 또한 선택자가 가져가야 할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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