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미팅이 끝났는데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애매하다. 충정로역 부근에서 만남이 있는데 2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어 거리구경도 할 겸 슬슬 걸어가 보기로 했다.
서울역 3번출구로 나와 염천교를 건너 걷다보니 배고픔이 엄습해 온다. 마침 아까의 약속을 맞추려다보니 점심식사 시간이 어정쩡해 한 끼를 걸렀는데,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려는 이 시각이 되니 뭔가 간단하게 요기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적당한 길거리 음식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중림동 삼거리 건너편으로 ‘콩나물떡라면’ 이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보인다. “이거다!” 하며 쾌재를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가로변에 달린 작은 부속공간이다. 점포의 가로길이가 넓어 간판 노출 면적이 커 큰 가게 같이 보이지만, 좁고 긴 공간일 뿐이라 점포 안으로는 테이블이 몇 개 없다. 손님 하나 없는 데다 냉방장치를 가동시키고 싶지 않은지 모든 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탁 트인 느낌이 좋았다.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재 너머 마을의 주막이 오늘날에도 있었다면 바로 여기에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들었다.
테이블에 끈적한 기름때가 붙어있는 게 가게의 오랜 흔적을 보여준다. 가게 안에 배인 짭조름한 냄새가 몇 십 년 동안 라면을 끓였는지, 또 얼마나 많은 술안주가 만들어졌는지 추측을 거듭하게 한다.
사장님이 바깥에 나와 앉아계셨는데, 처음 와본 나는 나와 같은 손님인줄 알았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들어가 제일 경치가 좋은 자리에 앉아 벽에 달린 메뉴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등장을 뒤늦게 알아챈 사장님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받으신다. 처음 온 가게지만 오래된 동네 단골가게 들른 기분이다.
“골뎅바지 입고 들어와 이렇게 늙었어”
중림동 오신 지 40년 됐다신다. 라면 가게도 40년... 찬장엔 진라면 매운맛이 그득히 쌓여있다. 어딘가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찾아내시곤 그 안에서 살금살금 콩나물을 꺼내신다. 5분쯤 지나 냄비에 담겨 나온 라면을 바라보는데 그냥 웃음이 나온다. 퉁퉁 불어난 가래떡과 아직 숨이 덜 죽은 콩나물이라니 이 언밸런스함은 뭘까? 어찌 보면 성의 없어 보이는 한 그릇인데, 난 왜 웃음이 나오고 군침이 돌까?
그리고 뜻밖에 먹기에 부담이 없다. 후룩거리며 야금야금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데... 맛없는데 맛있는 역설의 세계가 펼쳐진다. 면부터 건져먹다보면 콩나물은 국물에 점점 익어가고, 콩나물이 익는 만큼 국물도 빨리 식는다. 불어난 가래떡은 질깃하지 않아 국물과 함께 들이키기에도 부담이 없다. 오히려 라면 스프가 적당히 스며들어 따로 끓여넣어 탱글한 느낌이 가득한 쫄깃한 가래떡처럼 이질적이지도 않다.
이 가게의 진수는 40년 라면장사하신 할머니 사장님의 존재다. 나에게 라면을 내주시곤 원래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한길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중얼중얼하시는데... 혼잣말인지, 그냥 먹으며 들으라는 건지, 나와 대화하고 싶으신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라면을 먹는 10분 동안 내가 이 동네 사람, 중림동 주민이 된 듯 낯설면서도 익숙한 세계로 로그인하고 말았기 때문... 아마도 위생을 따지고 깔끔한 분위기와 고급스런 식감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들어왔다가도 금방 일어날만한 곳이지만, 이런 기분 아시는지?
할머니께서는 바로 옆의 약현성당을 다니시는지 지나가는 교우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지나치는 주민들에게 동네 사람의 소식을 전한다. 마침 교우 한 분의 상을 당하여 오늘은 그게 빅뉴스다.
“저번에 같이 XX했던 OOO있지? 젊은 사람이 먼저 갔어... 할머니도 건강 조심하시우...”
“그려 그려~~!”
“에구에구~~”
도시가 촘촘히 형성되며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시대다. 마을 앞에 있던 동구 밖 큰 나무 밑 평상이란 건 이제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동구_洞口;동네 입구를 뜻하는 한자어) 동네 어르신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은 뛰어놀고, 마을 사람 모두가 여기를 지나야만 집과 직장(논밭)과 학교를 오가는... 지금으로 따지면 커뮤니티 공간이 당시의 큰 나무나 평상이었던 게다.
나도 평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주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으니 이제 한 세대만 더 지나면 잊혀질 것들이다. 이 가게는 옛날의 평상 역할을 하는 중림동 최후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맛이 최고의 맛이라, 맛없는데 맛있는 역설의 식경험을 하게 한다.
먹다보니 어린 시절 시골 외가댁 갔을 때 부뚜막 뒤에서 막내 이모가 몰래 끓여주던 라면이 생각난다. 동생들과 소나기에 쫄딱 젖어 떨고 있었는데, 식은 연탄불에 끓인 라면 하나를 다같이 나눠 먹었다. 물이 끓는데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아 “이모 ‘나면’(라면의 유아어) 언제 끓어?”를 백번 넘게 물어본 듯...
나눠 먹다보니 두어 젓가락으로 끝났지만 식량을 귀하게 여기던 마지막 시절인지라, 엄한 외할아버지 몰래 먹을 수 있던 유일한 한 개였기에 맛없는 라면이었지만 너무너무 맛있었다. 옛날 어느 수필에 적힌 ‘왕후의 밥, 거지의 찬’. 이것도 역설의 맛이었기에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추억을 수필로 옮겼을 게다.
한 그릇 완면하고 표표히 떠나려는 순간! 어랏! 카드 안 된 댄다.
계좌이체 5천원... 할머니 폰뱅킹하신다. 외상은 꿈도 꾸지 말 것!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