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는 진부해서요..."
지인의 한 마디에, 발끈하면서도 씁쓸했다. 순두부찌개는 김치찌개와 더불어 대표적인 국민메뉴이기 때문이다. 김밥천국을 비롯한 분식점에서부터 일반적인 밥집의 필수 메뉴 중 하나다. 그러니 진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고급스런 한정식집에서도 취급할 만큼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스펙트럼이 넓은 메뉴이기도 하다. 콩을 정교히 다뤄 어떻게 순두부를 만들어내느냐, 순두부를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순두부는 콩으로 두부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물을 빼지 않고 딱딱하게 경화시키지 않은 두부다. 원래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으로 간을 해 순두부만 먹었다고 하나, 현 세대로 넘어오며 백반의 형태나 찌개의 형태로 더 친숙하다.
그런 순두부 중에서도 최고라고 정평이 난 순두부가 바로 초당순두부다. 강릉의 3대 음식으로 초당순두부, 동치미 막국수, 장칼국수를 꼽는데, 이 중에서 강릉의 동네 이름이 들어가는 만큼 강릉의 지리, 문화, 역사 등의 로컬리티를 담뿍 품은 음식이 ‘초당순두부’다.
초당순두부는 그 유래부터 재밌다. 허난설헌,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의 호가 초당이다. 허엽이 만든 두부가 맛있어 초당두부의 전승과 유래가 생겼다고 한다. 강릉 초당동 이름의 유래는 이와는 조금 다른데, 지금은 허난설헌 생가로 보존되고 있는 허엽의 집이 있어서 초당동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있지만, 당시 이 지역의 유력한 양반이었던 강릉 최씨들이 초당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등 그 설이 다분하다.
그런 옛 이야기를 제쳐두고도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민물과 짠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대관령에서부터 물이 흘러와 경포호를 지나 강문해변에서 동해와 합류하는 경포천이 흐르는 곳이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초당동은 경포호의 동남쪽, 강문해변의 서남쪽에 위치한 곳이라 서쪽에서는 맑고 깨끗한 물을, 동쪽에서는 바닷물을 끌어올 수 있는 장소다.
두부를 만드는데 바닷물이 중요했던 건 두부를 응고시키는 용도로 간수를 사용하는데, 바닷물에서 간수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에는 바닷물로 만든 간수는 쓰지 않는다. (복잡한 과학이야기는 잘 모르는 관계로 생략한다.)
원래 초당두부는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졌으나 점점 유명세를 타면서 강릉 관광객들이 반드시 먹어야만 할 강릉음식이 되면서 초당순두부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당동 주민센터와 강릉고등학교 사이를 서남에서 동북으로 가로질러가는 길을 초당순두부길이라 이름 붙였고, 이 길을 따라 돌아다니다보면 눈으로만 훑어도 20여개의 순두부 가게를 볼 수 있다
여튼 좋은 물맛과 허엽이 살았던 조선 중엽 1550년대부터 500년 가까이 이어져온 전통 덕분인지 ‘초당두부’, ‘초당순두부’라 하면 명품 두부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보니 환자식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큰 병을 앓는 환자들의 경우, 각종 검사나 의약품의 복용 등의 이유로 식단 조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저염식이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육식을 할 수 없을 때도 있고, 딱딱하고 질긴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조건에 맞춘 음식은 맛이 없다. 짜고 매운 반찬은 모조리 물에 빨아 먹어야 하고, 당연히 염분이 많이 들어간 국물류는 못 먹는다. 기껏해야 미음이나 죽, 흰쌀밥 정도다.
이럴 때 단백질이 듬뿍 들어간 콩을 재료로 한 두부나 순두부 요리는 적지않은 위로와 만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알게 된 ‘순두부 맛집’ 겸 ‘병원 맛집’을 소개한다. 서울 아산병원 경계 안에 있는 식당 ‘가람’으로, 엄밀히 말하면 아산병원 장례식장 쪽에 붙어있는 몇 개의 식당으로 구성된 식당가에 있다.
미리 테이블 세팅이 된 자리에 앉으면 아주 진귀하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 세팅지와 숟가락, 젓가락이 3선일치된 상태로 놓여져 있는데, 약간의 강박이 느껴질 정도로 정갈함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하얀 벽면에 그림이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고, 창 밖에는 푸른 대나무 화단이 있어 병원에서 느끼기 쉬운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쉐프 추천메뉴는 불낙뚝배기이고, 여름 특선메뉴로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를 선보이고 있지만, 7,500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착한 가격을 보고 초당순두부를 주문했다. 처음에는 가격이 의심스러웠고, 다음으로는 진짜 초당순두부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잠시 후 내어 준 요리를 맛보니 초당순두부가 맞았다. 사실 가격도 특별히 비쌀 이유가 없다. 순두부 자체만 끓여서 나오는 거라 식재료를 더 사용하거나 특별한 조리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 말이다.
한 숟갈 맛보니 몽글몽글하면서도 적당히 단단한 식감, 콩의 구수함 속에서 배어나오는 달작지근함... 강릉에서 먹어봤던 초당순두부가 맞다. 이 정도면 순두부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우선 다른 것 없이 순두부만 먼저 먹어보자. 다소 맛이 밋밋하지만 너덧 숟가락은 순두부 본연의 맛과 식감으로만 즐기고, 그 다음에는 접시에 조금씩 덜어 양념장을 끼얹어 조금 짭잘하게 먹어 본다.
3가지 반찬도 훌륭하다. 정갈하게 담아 나온 만큼 맛도 깔끔하다. 가장 돋보이는 건 숙주나물이다. 숙주나물 자체가 심심하게 먹는 메뉴인데다 아삭아삭, 아작아작 거리면서도 살짝 질겅거리는 섬유질의 느낌이 물컹거리는 순두부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김치는 의외로 싱겁다. 김치맛이 살짝 부족해 약간 서운하지만 젓갈로 은은하게 간을 한 정도에서 멈춘 저염처리가 훌륭하다. 벌건 빛깔에 비해 전혀 맵지 않다. 물김치 수준? 우엉조림도 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저염식으로 반찬 모두가 환자식 레벨에 맞춰져 있었다.
순두부를 어느 정도 먹어 나가다가, 뚝배기의 절반 정도를 남길 즈음 밥 몇 숟갈을 덜어 순두부와 비벼 먹어보았다. 꼭꼭 씹을수록 쌀밥의 단맛과 순두부의 구수함이 겹쳐져 순식간에 밥 한 공기까지 뚝딱 먹어 치웠다.
개인적으로는 강릉 초당순두부 중에선 ‘초당한솔순두부’를 좋아하는데, 마지막으로 가본 게 벌써 5년이 되어가는 듯하다. 맛이 그대로인지 알아보러 멀지않은 시기에 강릉 스케줄을 잡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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