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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1주년 추념(1)] 광복 이후 새로운 혼란에 휘말린 제주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4.01 10:40 의견 0

봄입니다. 여기저기에 가득 핀 유채꽃을 구경하기 위해 제주도행 티켓을 끊으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넓게 핀 유채꽃과 푸르른 바다, 봄의 향을 머금은 다양한 먹거리는 제주여행의 활력을 주죠.

하지만 제주도민들 가운데는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다니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동백꽃은 “4.3에서 희생당한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추운 겨울 차가운 땅으로 소리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92년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동백꽃 지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4.3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받게 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7년 이후입니다. 이전에는 4.3을 세상에 알리기만 해도 경찰에 연행되고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 4.3을 알린 작가들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표작 <순이삼촌>을 통해 4.3의 참상을 알린 현기영은 감옥에 감금되어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도대체 4.3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을까요

▲ 4.3 70주년 동백꽃달기 기념사업 포스터 ⓒ 제주4370 홈페이지

4월 3일은 제주도의 남로당 무장대가 미군정,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날입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제주도가 평시체제를 회복할 때 까지 이어집니다. 약 6년 6개월 만의 일이죠. 그러나 제주도 4.3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8년 3월 1일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주도는 일제 강점 이후 일본군이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일본군 약 6만여 명이 상주했으며 비행장을 만들고 땅굴을 파는 등 마지막 방어선으로 사용하기 위한 많은 공사들을 진행했죠.

이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차출되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한 명까지 죽음으로 맞선다는 옥쇄작전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제주도민은 말 그대로 죽음의 시간을 버텨왔습니다. 그러던 중 광복을 맞이했기 때문에 제주도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 제주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의 모습. 알뜨르 비행장 자대는 원래 농지 겸 목초지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조선군이 모슬포 주민들을 동원해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군용 비행장으로 건설했다. 1944년 10월 3차 공사로 레이다 진지와 각종 지하 진지들이 건설되었다. 1945년 2월 9일, 연합국의 상륙에 대비해 각 시설을 잇는 터널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 위키백과

광복 후 제주도민들은 새 나라의 건설을 위해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했고, 일본인들이 나간 뒤의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자치적으로 채워나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힘입어 남북한 통일 정부가 아니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겠다고 나서고 있었습니다. 미군정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정권 수립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다른 지역들과 달리 제주는 온건한 입장을 보이며 손을 잡고 협력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제주도를 떠나있던 주민들이 제주도로 갑자기 돌아오며 인구가 급증했고,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콜레라가 발병하면서 수백 명이 죽음을 맞이했고, 식량부족 현상도 겹쳐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죠. 게다가 일제에 붙어 제주도민을 탄압하던 경찰들은 미군정 경찰로 탈바꿈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급급했죠. 결국 제주도 내에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됩니다.

그러던 와중 1947년 제주에서 3.1절 기념 대회가 개최됩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북국민학교에서 3.1절 행사가 끝난 오후 2시부터 가두행진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관덕정을 거쳐서 서문통으로 행진의 행렬이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굽에 어린 아이가 다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지슬'은 4.3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된 독립영화로 제 2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만장일치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 네이버 영화

이에 흥분한 군중들이 항의하며 돌을 던지자, 경찰은 이를 무력시위로 간주해 총을 발포하며 민간인 6명을 사살합니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짓고 3.1절 기념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합니다. 경무부 또한 당시 시위대가 경찰서를 포위해 습격하려 했다고 발표하죠. 제주도 내 민심은 악화되었고, 미군정에 대한 반발심이 강해졌습니다.

이에 당시 수세에 몰리고 있던 남로당 제주위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경찰에 반하는 활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을 진행했으며 3월 13일까지 제주도에 있던 95%의 기관 및 단체가 파업에 동참하며 일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미군정이 작성한 정보보고서에는 “제주도인구의 70%가 좌익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합니다. 당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보고서인 셈이죠. 따라서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없애겠다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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