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26)] 흥선대원군, 조선의 정궁 경복궁 중건을 결심하게 된 이유
- 송군호 선생님께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4)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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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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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군호선생님 ☞ 일반적으로 역사적 흐름을 말할 때 국가나 왕조에 ‘후기’라는 용어가 들어간다면, 사회가 혼란한 시기에 접어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후기=혼란’으로 이해할까요 그 이유는 왕조의 전기와 중기는 상대적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며 강력한 왕권이 수립되지만, 후기로 가며 왕권이 약해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설: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겠지만, 후기는 사회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다.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백성의 의식이 성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기존의 정치 세력은 고인물이 되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만다.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이 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이렇게 후기로 접어들면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이 등장하고 사회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며 혼란스러워진다.
▲ 보물 제1499-1호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화. 1863년에 그려진 초본을 바탕으로 흥선대원군의 나이 50세가 되는 1869년에 이한철과 유숙이 함께 그린 것이다.흥선대원군은경복궁 중건이라는 카드를 내세워 민심을 한데모으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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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강화를 숙제로 떠안은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을 결심하다.
송군호선생님 ☞ 왕권이 약해졌다는 말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신권이 강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대신들, 신하들이라고 볼 수 있죠. 여기서 내가 왕이라고 가정을 해봅시다. 왕권이 약하면 신하들은 기존의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왕을 세우려 하겠죠. 왕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결국 둘은 전쟁을 치르게 되고 정부 통제력이 떨어지게 되죠.
정부 통제력이 약해지면,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무신 세력이 급성장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적 흐름을 보면 이런 흐름이 일종의 공식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다 합쳐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고 하는 것이죠.
조선후기, 19세기는 특정 집안의 권력이 국정운영에 개입하면서 왕권이 가장 축소된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가 6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니까 60년간 왕권이 실추되었다는 것이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예로 조선 후기에는 왕을 독살하려는 자들이 늘어납니다.
해설: 조선 왕조 전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나라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왕을 독살하고자 하는 생각을 감히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신하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왕족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독살을 계획한다.
송군호선생님 ☞ 지금까지 늘어놓은 설명들이 바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결심한 이유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하기 위한 사전 설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바로 이렇게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이라는 카드를 꺼내듭니다. 경복궁은 원래 400칸이 채 되지 않는 390칸 정도 되는 규모의 작은 궁궐이었습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결정하면서 경복궁의 규모를 대거 확장합니다. 7,000칸까지 그 규모를 늘리죠.
왜 이렇게까지 경복궁 중건을 해야만 했던 걸까요 바로 이 공사를 통해 국가의 모든 역량이 집결되기 때문이죠. 7,000칸 증축공사로 규모가 커지면 이 공사는 국가의 최고 사업이 됩니다. 이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겁니다. 국력을 여기에 모으기 위해 관리와 백성들 모두의 마음을 결집시킨 다음, 경복궁 중건을 선언하죠.
해설: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실추된 왕권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경복궁 중건이었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었으며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건물이었지만 폐허가 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이렇게 상징적으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하려던 데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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