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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20)] 격변하는 동아시아 : 청나라의 쇠퇴

김혜령 기자 승인 2018.07.06 10:29 의견 0

- 경복궁 중건 당시 조선의 주변 정세 (上)-

동아시아의 오랜 맹주는 중국, 당시에는 청나라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최고라는 자부심에 젖어있었던 탓일까 청나라는 서구열강의 침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중국의 차를 수입하던 영국은 자국의 은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자국민이 아편으로 병들자, 중국에서는 아편 수입을 금지했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1840년 중국과 전쟁을 일으킨다. 오늘날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영국과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맺게 된다. 조약의 내용에 따라 홍콩을 유럽에게 넘기고, 5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하게 된다.

이후 중국은 남경조약의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적은 교역량을 빌미로 영국은 1857년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제2차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수도인 베이징까지 함락 당하게 된다. 이후 또 한 번의 불평등조약인 베이징 조약까지 맺으면서 빠른 속도로 동북아시아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홍장의 모습. 이홍장은 태평천국운동을 막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양무운동을 이끄는 주요인물이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중국 내부에서도 태평천국운동이라는 종교운동이 펼쳐진다. 태평천국운동은 홍수전이 창시한 그리스도교 비밀 결사단체인 ‘배상제회’를 기반으로 1851년부터 1864년까지 일어난 농민운동이다. 태평천국운동은 한족의 부흥을 꿈꾸었으며 모두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은 내부의 분열과 지방의 유력자인 향신층이 진압을 하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끝나게 된다. 지방의 유력계층의 세력으로 등장한 인물이 이홍장이다. 이홍장은 이후 일어나는 양무운동을 이끄는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이렇게 외부세력의 중국 침략과 내부의 갈등은 중국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후 중국은 ‘자신들의 사상을 밑바탕에 두고 서양 기술을 배우자’라는 양무운동을 전개한다. 태평천국운동을 저지한 이홍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양무운동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새로운 국가로의 발전을 꾀해보지만, 낡은 사상위에 기술만을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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